시골집
158편 === 느릅나무 차를 마시며...
凡草
2007. 5. 26. 07:22
< 느릅나무 차를 마시며... > 2007년 5월 24일 목요일 맑은 뒤 비 요즘 아내의 건강이 좋은 편이 아니어서 어젯밤에 나 혼자 노루실에 갔다. 아내가 대상포진을 앓은데 이어서 감기로 또 고생하고 있다. 아내가 아프니 온 집안이 칙칙하고 어두웠다. 이제 거의 다 나아가는데 무리를 하지 않으 려고 나 혼자 노루실에 다녀오기로 했다. 나도 그동안 기침으로 고생을 많이 했는데 이제 정상을 회복하고 있다. 이번 감기는 어찌된 판인지 잘 낫지 않아서 시간을 많이 끌었다. 내가 기침을 심하게 하자 제자들이 걱정을 많이 해주고 마실 것을 보내주어서 고맙기도 하고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나는 그들이 아플 때 해준 것이 아무 것도 없는데 선생이라는 이름 하나로 받기만 해도 되는 것인지.
진이가 낳은 강아지는 다 나누어 주었다. 도담에게 두 마리, 반장집에 한 마리. 두 마리는 관리 부족으로 죽었고. 어지간하면 진이가 외롭지 않게 강아지 한 마리를 같이 키우려고 했는데 강아지가 자꾸 빠져 나와서 도저히 키울 수가 없었다. 사람이 늘 붙어있지 않으니 강아지가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질지도 모르고 강아지 먹이를 제때 챙겨줄 수 없으니 키울 수가 없었다.
이번에 가보니 진이가 또 밖으로 나와 돌아다니고 있었다. 여태 철망을 쳐서 가두어 두었는데 진이가 철망 밑으로 교묘하게 빠져 나오는 방법을 알아내어서 철망이 아무 소용이 없었다. 진이가 나 없을 때 마을을 제 마음대로 돌아다녔는지 마을 사람들이 싫어하였다. 밭에 들어가기도 하고 집안으로 들어가서 기웃거리기도 하고 지나가는 아이들을 물려고 해서 아이들이 자지러지게 놀랐다는 말도 들렸다.
그래서 지난 주에는 할 수 없이 남의 원망을 듣지 않으려고 줄로 묶어 놓고 갔는데 오늘 가보니 이젠 목테두리까지 벗어던져 버려서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아무래도 진이를 더 이상 키울 수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풀어 주고 싶은데 이웃 사람들이 싫어하고 늘 묶어 놓자니 외로워서 보기가 딱했다. 가까운 시일 안에 진이를 반장집에 넘겨 주든지 달라는 사람이 있으면 주기로 했다. 그동안 정이 많이 들었는데 요즘와서는 진이의 여러 가지 결점을 계속 보게 되니 나하고 정을 떼려고 그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강아지만 해도 그랬다. 강아지 먹으라고 사료를 물에 불려서 주면 진이가 먼저 먹었다. 강아지가 먹으려고 하면 사납게 짖어서 못 먹게 하는 것이었다. 어미가 어찌 저럴 수가 있을까? 사람 같으면 자식을 먼저 먹이고 나중에 먹을 텐데 개는 그렇지 않았다. 새끼보다 자기 배를 먼저 생각했다. 강아지 한 마리가 철망에 걸려 죽어 있을 때도 진이는 본둥 만둥 했다. 죽은 강아지를 안타까워하지도 않았고 죽은 강아지를 빼내려고 애쓰지도 않았다. 개는 새끼를 낳기만 하면 그만인가? 모성 본능이야 있겠지만 내가 생각했던 만큼 그렇지는 않아서 실망했다. 어제 노루실로 들어갈 때는 호포 꽃농장에 들러서 야생초를 몇가지 사갔다. 앞으로 진이를 안 키우게 되면 꽃과 나무에 더 마음을 쏟으려고 없는 돈을 털어서 샀다. 마침 인터넷으로 동화공부를 하겠다는 사람이 6개월분 수강료 20만원을 보냈기에 그 돈에서 49000원을 헐어서 꽃을 샀다. 만병초, 송솔, 야생치자, 단정화, 천황매, 수련목, 천상초, 하늘 매발톱- 이렇게 8가지를 사서 마당 한 쪽에 정성들여 심었다. 오늘 비가 온다고 해서 심었는데 오후 늦게까지 비가 내리지 않았다. 일단 물을 주긴 했는데 잘 살아날지 모르겠다. 저녁에 부산으로 돌아온 뒤에 비가 많이 내렸다. 오늘 심은 나무 중 반이라도 살아난다면 애써 심은 보람을 느낄 것이다. 대숲 안에 숨어 있는 골담초도 다시 두 그루를 파내서 심었다. 이미 심어 놓은 골담초가 시들시들해서 살아날 때까지 심겠다는 마음으로 다시 심은 것이다. 오늘 심은 것은 다음에 와서 보면 살아났는지 죽었는지 알게 될 것이다. 무엇을 심어 놓고 살아날 것인지 기다리는 재미는 마치 복권을 사 놓고 발표를 기다리는 마음과 비슷하다. 흙속에 메마른 뿌리를 집어 넣고 물을 주기만 하면 살아나는 놀라운 기적이여! 나는 도시에서보다 노루실에서 기적과도 같은 일을 더 많이 본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가 살아나는 일이 그러하며 생생한 계절의 변화도 놀랍다. 야생초를 심은 뒤에 아침을 먹고 밭으로 가서 오전 내내 일을 했다. 다리가 아플 때까지 밭 가장자리에 돋아난 잡초를 뽑고 나무 주변을 돌보아 주었다. 얼마 전에 나무 심을 시기가 한참 지난 뒤에야 무화과와 엄나무를 심었는데 오늘 보니 살아난 것 같아서 흐뭇했다. 나무도 혼자서는 잘 살아갈 수 없다. 이웃에 다른 나무들이 많이 들어서서 숲을 이루어야 서로가 울타리가 되어 잘 살아갈 수 있다. 지금 저수지를 끼고 있는 밭 700평이 매물로 나와 있는데 틈나는 대로 주위에 많이 소개하고, 앞으로도 팔 땅이 나오면 자꾸 알려서 이웃을 늘려갈 생각이다. 나 혼자 사는 것도 좋지만 아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외롭지 않을 것이다.
점심을 먹고 쉴 때는 느릅나무와 뽕나무 잎을 따다가 차를 끓여 마셨다. 느릅나무와 뽕나무는 노루실에 아주 흔하고 제일 간편하게 끓여 마실 수 있다. 기침이 다 나아가지만 아직도 잔 기침이 남아 있으니 느릅나무 차가 도움이 될 것이다. 느릅나무 가지와 뽕나무 가지를 낫으로 베어다가 주전자에 물을 붓고 끓이기만 하면 차가 되니 아주 손쉽다. 맛도 깊고 그윽해서 마실만 하다. 한 주전자 끓여 놓고 수시로 마셨다. 이 느릅나무 차를 마시면 노루실 대자연이 내 몸속으로 솔방 흘러들어오는 느낌이다. 마당에도 느릅나무가 있고 집뒤란에도 느릅나무가 있고 찻잔 속에도 느릅나무! 푸른 느릅나무가 온통 나를 둘러싸고 있다. 약간 끈적 끈적하면서도 향긋한 느릅나무차! 가장 맛있는 음식이 공짜로 먹는 음식이라는 우스개가 있는데 이 느릅나무차는 노루실 마을이 내게 돈 안 받고 공짜로 주는 차다. 댓가를 안 받고 공짜로 베푸는 삶의 지혜까지 알려주는 고마운 느릅나무 차를 훌훌 마신다. 이 좋은 차를 여기서만 마시기엔 아까워서 집에 가서도 한 두 번 끓여 마시려고 가지를 조금 꺾어 봉지에 담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