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8년 10월 18일, 토요일, 맑음 >
시월에는 문학 행사가 많아서 주말마다 바빴다. 노루실에 간 지가 3주도 넘은 듯하다.
하도 오래 안 가서 노루실을 도둑 맞은 것만 같다. 어제 저녁에 아내와 노루실로 들어갔다.
아침에 일어나니 여름보다는 스산한 기운이 감돌았지만 풍경은 여전히 좋았다. 봄은 봄대로 좋고, 여름은 여름대로, 가을은 가을대로 볼 거리가 있었다. 나무들이 얼마간의 나뭇잎은 떨구어 놓은 채 등불처럼 노란 나뭇잎을 달고 있는 모습이 흡사 풍경화 같았다. 그 멋진 장면을 보고 있노라니 나도 그림 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 들었다.
아침은 역시 늘 하던 대로 뽕잎밥이다. 뽕잎을 많이 넣었더니 밥색깔이 뽕잎에 물들어서 노랗다. 밥맛을 보면 약간 달착지근하다. 쌀이 안 좋더라도 뽕잎밥을 하면 맛이 좋을 것 같다. 뽕잎을 뜯어서 뽕잎차도 끓였다. 지난 번에 제자들이 장을 넉넉하게 본 탓으로 그때 먹은 김치와 반찬이 아직도 남아 있어서 아침에 잘 먹었다.
아침을 먹고는 마당으로 나가서 돼지감자를 캐기 시작했다. 진이가 있던 마당에 돼지감자를 심어 놓았는데 캐어보니 알이 굵지는 않아도 제법 나왔다. 동글동글, 울퉁불퉁. 데구르르. 도깨비뿔처럼 요상하게 생긴 녀석들이 굴러나왔다. 보기엔 못생겼어도 어쩐지 정이 간다. 진이가 뛰놀던 자리에서 나온 열매들이라 그런 것일까? 밭은 풀밭으로 변해 아무 것도 캘 것이 없었는데 뜻밖에도 마당에서 캘 것이 나왔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살으랬다고, 이게 없으면 저걸로 살고, 저게 없으면 고걸로 살면 될 것이다. 어떤 나쁜 일이 있더라도 좋은 쪽으로 생각하고 긍정적인 마음을 갖고 살아가야 하겠다. 오늘 캔 요놈들은 집에 들고 가서 요구르트를 섞어 갈아 먹기로 했다.
내가 구포장에서 사온 겨울 상추 모종을 밭에 심는 동안 아내는 감을 땄다. 올해는 작년보다 조금 더 많이 땄다. 작년에는 몇 개 밖에 못 땄는데. 나는 과일을 좋아하기 때문에 적은 수확이라도 참 반갑다. 가을에는 시골에 오면 이런 솔찮은 즐거움이 있다. 일을 하다 보니 어느새 11시 30분이 지나고 있었다. 이제는 문을 잠그고 가야 할 시간이다. 표충사 부근에 사는 잔디님 집에서 점심을 하기로 약속을 했기 때문에 서둘러 떠나기로 했다. 잔디님은 어렸을 때 운정리에 살았던 분인데 내가 쓴 노루실 일기를 보고 연락을 해서 알게 되었다. 잔디님이 알려준 약도를 들고 표충사 쪽으로 차를 몰았다. 표충사 매표소를 10미터 앞두고 왼쪽으로 꺾어 소담재를 찾아갔다. 마침 잔디님이 문앞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 보는 분이었지만 상냥하게 맞아주어서 고마웠다.

소담재는 백 년 전에 지은 집과 곰배령에 사는 목수가 2년 전에 지은 새집이 나란히 붙어 있는 집이다. 집안에 들어서니 재약산과 향로봉 같은 주변의 산들이 호위하듯 빙 둘러 서 있었다. 한 마디로 천하의 명당이었다. 이렇게 경치가 좋은 곳에 자리잡은 집은 처음 보았다. 마당에 서 있으니 재약산과 이웃한 여러 봉우리들의 사열을 받고 있는 기분이었다. 아내와 나는 감탄하느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렇게 멋진 집에 초대를 받아서 기뻤다.

잔디님이 점심을 먹으러 오라고 할 때만 해도 이렇게 좋은 집인 줄은 몰랐는데, 직접 와보니 상상을 초월한 집이었다. 점심은 잔디님이 직접 만든 우리밀 칼국수로 먹고 집안을 차근차근 둘러보았다.

불을 때어 자는 황토방도 현대식과 한옥의 장점을 섞어 놓아
운치가 있으면서도 생활하기에 편리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대들보 위에 만들어 놓은 서재겸 다락방은 아주 탐나는 곳이었다. 저 다락방에 올라가 있으면 어떤 글이라도 척척 써질 것만 같다.

현대식으로 만들어 놓은 화장실과 싱크대를 둘러보고 집밖을 내다보니 추녀 밑에 선반이 짜여져 있었다. 선반에는 효소나 술병, 연장들을 얹어 놓을 수 있게 만들어 놓아서 집을 참 쓸모있게 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안을 둘러보고 마당으로 나가 잔디님 바깥분이 가꾼
꽃밭을 구경하였다. 정성들여 가꾼 흔적이 역력했다.
난 노루실에서 꽃보다는 야생초를 제멋대로 키우는데
이 집에는 화초를 계획적으로 잘 키워 놓아서 아기자기하였다.
커피를 마시고 과일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만 일어서기로 했다. 오래 앉아 있어도 시간 가는 줄 모르겠다. 좋은 집을 구경하고 점심까지 얻어 먹어서 무척
행복한 날이었다.

다음에는 노루실에 한 번 초대해야지. 또 인연이 닿으면 이 집에 와서 한 번 자보고 싶다. 노루실도 아침이 제일 좋은데 이 집의 아침 풍경은 어떠할까?
내 제자들도 이 집에 와 본다면 아주 좋아할 텐데...
다음에 시간을 한 번 맞추어 봐야겠다.

이곳의 아침을 생각하기만 해도 귓가에 새소리가 들리고
재약산의 구름이 눈앞에 걸려 있는 것만 같다.
돌아오는 길에는 밀양댐을 거쳐서 벡스코 차 박람회 장소로 갔다.
글나라 카페 회원인 정소암님을 만나 지리산 잭설차를 맛보았다. 잭설차는 작설차를 발효시킨 차를 말한다고 하는데 솥에 덖지 않고 일일이 손으로만 비비고 띄워서 만드는 게 특징이었다. 맛은 은근하고 깊었다. 정소암님의 잭설차가 널리 알려지고 우리 차가 세계로 수출되기를 바라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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