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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이자경] 주인공처럼? 아니, 주인공 답게! ( 제 5회 황금펜 당선작품)

凡草 2008. 11. 25. 16:25

 

(  2008년  제5회  황금펜  당선 동화 ) 

      주인공처럼? 아니, 주인공답게!

                                                                      꿈이랑  이자경


 


 “이번 학예회 때 6학년 여학생들은 밸리 댄스를 하기로 했어.”

 “아, 그거 배꼽 내 놓고 이렇게이렇게 하는 거 잖아요.”

 까불이 명우가 일어서서 아는 체를 한다.

 “우우!”

 “꺅!”

 명우를 비롯한 몇 명은 낄낄거리며 내 쪽을 본다.

 <키에 비해 몸집이 옆으로 퍼지고 굵은 모양.>

 나의 신체 특징에 대한 사전적인 표현이다. 그러나 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든 열세 살 여자아이에게는 더욱.

 <뚱뚱하다=마음에 몸무게만큼의 추를 달고 산다. 예쁜 옷을 싫어하는 척 한다. ‘공부도 잘 한다’와 ‘공부는 잘 한다’의 차이를 잘 안다. 친한 친구가 팔짱을 끼어도 의심의 눈길로 보게 된다.(나랑 비교되면 누구나 날씬해 보이는 법이니까.) 맛있게 먹을 때, 부모님의 흐뭇한 눈길 대신 걱정스런 눈길을 받게 된다. 신체검사는 인격모독이다.>

 내가 만드는 낱말 사전에 적힌 내용이다. 새로운 뜻 하나 추가!<학예회도 고문이 될 수 있다.>

 학예회 전에 학교가 문을 닫든지 이사를 가면 좋겠다. 그렇지만 둘 다 가망성이 없다. 무슨 일이 생기기엔 한 달은 너무 짧다.

 “따라라라라라 따란따라라”

 강당에는 신나게 음악이 흘렀다. 난 급식 시간에 거의 굶다시피 했는데도 배가 자꾸 출렁거리는 것 같았다. 배에 힘을 주고 살금살금 움직였다.

 “오하나, 동작 크게 해! 점심도 못 먹었니?”

 “와하하!”

 선생님의 지적에 아이들이 모두 돌아보았다. 선생님은 도대체 배려라는 말을 알기나 할까? 하긴 사전에 ‘여러 모로 자상하게 마음을 씀’이라고만 되어 있으니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는 것도 당연하다.

 난 더 이상 선생님 눈에 띄지 않게 열심히 움직였다.

 “그게 아니야, 선생님 잘 봐. 이게 안 되니?”

 아이들 대부분은 허리를 돌리는 게 아니라 고개만 배배꼬고 있다. 다행이다. 덕분에 나에게 관심을 쏟을 새가 없을 테니까.

 “하나야, 같이 가자.”

 미혜다. 별명이 땅콩이다. 오겹살보다는 훨씬 귀여운 별명이다.

 “선생님 허리 봤지? 진짜 살이 빠지긴 빠지나 봐. 우리 엄마한테도 가      르쳐 줘야지. 요즘 살 뺀다고 난리도 아니…….”

 미혜는 말을 하다 말고 내 눈치를 본다.

 휴, <뚱뚱하다는 건 가끔 죄 없는 친구를 민망하게 만든다. >도 덧붙여야 하겠군.

 “근데, 너 아까 보니까 참 잘 하더라. 배웠니?”

 미혜가 얼른 말을 바꾼다. 앞의 말을 잊어 달라는 듯.

 “내가 못 하는 게 있니?”

 난 몸무게만 많이 나가는 게 아니다. 누구보다 자존심도 세다. 그래서 때로 아이들이 나를 밥맛이라고 한다는 걸 안다. 중요한 건 내 앞에서 그런 말을 못하게 하는 것이다. 덕분에 ‘조폭마누라’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그래, 넌 공부도 잘하지. 무엇보다 항상 자신감이 넘쳐서 좋아. 난 키만    안 자라는 게 아니라 마음도 점점 쪼그라드는 거 같애. 솔직히 키 크고 늘   씬한 유미 옆에는 서기도 싫어.”

 미혜가 콧잔등을 찡그리며 말한다.

 ‘그렇게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네가 더 당당해 보여! 내가 기죽지 않으려   고 얼마나 안간 힘을 쓰는 지 아니?’

 진짜 하고 싶은 말은 얼른 뱉어지지 않는다. 단물이 남은 껌도 아닌데.

 “뚱뚱하면 얼마나 미련해 보이는지 아니? 살을 못 빼겠으면 악착같이 공   부하란 말이야!”

 내 자존심은 엄마를 닮았나 보다. 자랑할 게 없는 딸은 용서가 안 되는 우리 엄마.

 “응, 이번에도 1등이래. 쟤가 아무래도 공부하느라 스트레스를 받아서 살    이 찌나 봐.”

 내가 공부를 못 하면 우리 엄마는 할 말이 없어서 밖에 나가지 않을 지도 모른다. 갑자기 힘이 빠진다. 미혜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언젠가 미혜에게는 내가 만든 사전을 보여 줄 수 있을까?

 “혹시 아니? 의학이 발달하면 내 살을 떼어서 네 키로 줄 수 있을지.”

 농담처럼 말했지만 그건 진담이었다.

 “어이구, 그럼 많이 모아둬라. 내 키를 위해서 떡볶이 사줄까?”

 미혜가 깔깔거리며 내 허리에 매달린다.

 학예회 연습은 그런대로 견딜만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은근히 재미있었다. 나도 몰랐던 사실이지만 내 몸은 꽤나 유연했다. 나는 집에서도 꼭 연습을 하고 잤다. 뱃살이 빠진다는 선생님의 말씀을 믿고 싶었다. 그리고 열심히 기도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말도 믿고 싶었다. 나는 열심히 연습하고 간절히 기도했다. 매일매일.

 역시 열심히 하는 사람을 당할 순 없나 보다. 선생님께서는 나더러 앞으로 나와서 시범을 보이라고 했다.

 “어떻게 제대로 되는 애가 하나뿐이니?”

 배려심이 없는 게 조금 문제이지만 빈말이라고는 할 줄 모르는 우리 선생님. 고래도 춤추게 하는 게 칭찬이라지 않는가.

 “와우, 오하나! 멋있다.”

 아이들이 박수까지 보내준다. 그렇지만 세상엔 언제나 마음이 예쁜 아이들만 있는 건 아니다.

 “완전 고래가 춤추네.”

 아이들의 함성을 뚫고 작지만 날카로운 가시 하나가 날아온다. 가슴에 콕 박힌다. 아픈 마음엔 어떤 말도 고깝게 들린다. 더군다나 유미 같은 아이가 하는 말이라면.

 “선생님, 하나도 앞에 서서 하게 해요”

 속셈을 모를 줄 알고? 흥, 코미디가 따로 없겠지. 사람들은 내 춤을 보는 게 아니라 출렁이는 배만 볼걸?

 “그럴까? 유미 옆에 서 봐.”

 선생님이 자리까지 정해 주신다. 그야말로 대략난감이다.

 “선생님, 하나에게 너무 잔인하신 거 아니에요?”

 나 때문에 번번이 일 등을 놓치는 수진이가 나선다.

 “뭐가? 잘하는 아이를 앞에 세우는 게 왜 잔인한 거지?”

 선생님이 눈을 똥그랗게 뜨고 수진이를 돌아본다.

 “아니, 그게 아니라.”

 수진이가 내 배를 보며 웃는다.

 “선생님 저 유미 옆에서 할게요.”

 내 목소리가 갈라졌다. 언제나 자존심이 문제다. 아이들은 잠깐 웅성거리다가 제 자리로 갔다.

 “하나야, 밸리 댄스는 본래 통통한 사람들이 추면 더 예쁘단다.”

 선생님은 그걸 격려라고 하시는 걸까?

 학예회 하루 전, 무용복이 배달되었다. 하늘거리는 붉은 색 치마에 검은 배꼽티였다. 물고기 비늘 같은 스팽글들이 빛을 받아 반짝였다.

 “꺅! 이걸 입는다고요? 어떡해!”

 유미가 비명을 질렀다. 가증스럽다. 차라리 ‘어머, 멋있어. 이 기회에 내 몸매를 맘껏 뽐낼 수 있겠네.’라고 하는 게 솔직해 보일 텐데.

 치마를 몸에 대어 보던 미혜가 울상이 되었다. 두 뼘은 길어 보였다.

 내 차례가 되었다. 옷을 빌려 주는 아줌마는 나를 보더니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제일 큰 옷인데.”

 아줌마가 내미는 옷은 보기에도 작았다. 미혜의 긴 치마는 줄일 수나 있지.이건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아니지, 하늘이 도운 거다. 사실 아무리 열심히 연습을 해도 뱃살은 변함이 없었다. 하느님도 한 달 만에 뱃살이 빠지게 해달라는 기도는 들어주기 힘들었나 보다. 어쨌든 다행이다. 설마 체육복을 입고 무대에 서라고 하시진 않겠지. 그것도 맨 앞줄에 말이다. 난 잔뜩 인상을 구기고 선생님께 갔다.

 “선생님, 옷이 작아요.”

 선생님은 옷과 나를 번갈아 보더니 아줌마를 불렀다.

 “어른 옷은 없어요?”

 “구해 보겠지만 내일까지는 아무래도 힘들 것 같은데요.”

 아줌마는 미안한 얼굴로 말했지만 나는 고맙기만 했다.

 풀죽은 미혜 옆에서 발걸음도 가볍게 집으로 향했다.

 “속상하지? 휴, 나도 속상해. 키높이 운동화라도 신을까 봐.”

 미혜는 돌멩이를 톡톡 차며 말했다.

 “치마 길이만 좀 줄이면 되잖아.”

 “치맛단 봤지? 길이를 줄여도 그 반짝이 장식이 보일까? 진짜 예쁘지? 그거   입으면 춤이 저절로 추어지겠던데. 아니, 가만히 서 있어도 예쁠 거야.       배꼽에 나비 스티커도 하나 붙일까?”

 미혜는 언제 속상했냐는 듯 눈을 반짝거렸다. 키 작은 미혜가 그 옷을 입으면 정말 요정처럼 보일 거다. 갑자기 추레한 체육복을 입고 교실에 숨어 있을 내 모습이 떠올랐다. 엄마한테는 뭐라고 하지? 사실 난 제일 멋지게 출 수 있는데. 빛나는 무대, 화려한 조명, 그리고 박수! 무엇보다 음악에 맞추어서 신나게 춤을 출 때의 그 기분. 그 모든 걸 포기해야 하다니. 아, 아니지. 내가 아무리 춤을 잘 추어도 사람들은 내 배만 볼 거야. 춤추는 오겹살로 별명이 바뀔 지도 몰라. 차라리 다행이야. 그래도 내 사전엔 이렇게 쓸 것 같다.

 <뚱뚱하다는 건 때로 기회를 잃는다는 것!>

 “참, 카메라 충전하는 걸 깜빡했네.”

 엄마는 저녁 밥상을 차리며 말했다.

 ‘필요 없어요.’

 입 안에 맴돌던 말을 꼴깍 삼켰다. 맞는 옷이 없어서 학예회에 참가 못한다고 하면 엄마 아빠는 뭐라고 할까? 밥맛도 없었다. 밥알을 조금 씹고 국물을 홀짝거렸다. 아빠는 눈이 동그래서 보았다. 그러나 그 뿐이었다.

 ‘살 찐 거 나중에 다 키로 가. 걱정 말고 많이 먹어.’

 예전에 아빠는 내가 밥을 남기면 그렇게 말했는데. 괜히 서운해진다.

 난 숟가락을 놓고 일어섰다.

 “연습한다고 몸살 난 거야? 약이라도 먹고 잘래?”

 정말 약이라도 먹고 싶다. 낫는 약이 아니라 아프게 하는 약 말이다. 내일 아침에 정말 아주 많이 아파서 열이 펄펄 나고 못 일어났으면 좋겠다. 그러면 학교에 갈 필요도 없고 엄마 아빠는 아무 것도 모를 수 있는데. 난 일부러 이불도 덮지 않고 침대에 누웠다.

 “아유, 배를 이렇게 내 놓고 자면 어째. 감기 들게. 우리 딸 배꼽은 이쁘게   도 생겼네.”

 아빠 목소리가 들렸다. 꿈일까? 마음에 ‘호오’입김이 와 닿는 것 같다.

 아침에 일어나니 불행히도 몸은 가뿐하다.

 “하나야, 오늘 학예회라면서? 아빠는 못 가는데 어쩌지. 잘해!”

 아빠가 눈곱이 붙은 눈으로 찡긋 윙크를 했다. 난 아빠의 눈곱에게조차 미안했다. 뭐라고 하지? 고개를 숙이고 빵만 우적우적 씹었다. 지금이라도 탁 체해 버리면 얼마나 좋아.

 “얘, 천천히 먹어. 누가 잡으러 오니?”

 엄마가 우유를 건넸다. 이게 상한 우유면 좋을 텐데.

 “먼저 가. 엄마도 준비해서 곧 갈게.”

 엄마는 미장원에 들러 한껏 멋을 부리고 올 거다. 엄마가 예쁘게 해 오는 만큼 나는 더 미안해지겠지.

 집을 나섰지만 막막하다. 어디로 새 버릴까 싶어서 미적거리고 있는데 유미가 나타났다.

 “넌 어쩌기로 했니? 옷은 왜 그런 걸 해 가지고. 속상하다, 그치?”

 나는 유미 얼굴을 한번 째려보곤 앞서서 씩씩거리며 걸어갔다.

 “같이 가!”

 냅다 뛰었다. 유미의 얼굴을 다시 보면 한 대 때려 주지 않고는 못 견딜 것 같았으니까.

 애들은 옷을 갈아입느라 정신이 없었다.

 “하나야, 이리 와 봐!”

 선생님이 부르셨다. 설마 체육복을 입고 추라는 말씀은 안 하시겠지. 엉거주춤 교탁 앞으로 갔더니 선생님께서 큰 가방을 하나 내미셨다.

 “이거 입어 봐. 선생님 친구 거야. 특별한 몸매에 아주 춤을 잘 추지. 선생   님도 그 친구 보고 반해서 배웠으니까. 아무에게나 안 빌려 준다는 거 멋진   친구가 입을 거라고 했어, 오하나는 시시하게 추지 않을 거라고 믿으니까.”

 선생님은 직접 옷을 꺼내서 내 몸에 대 보셨다.

 “와! 진짜 예쁘다.”

 미혜의 목소리에 아이들의 시선이 날아왔다.

 “혼자 너무 튀는 거 아니에요? 불공평해요, 선생님.”

 수진이가 볼멘 소리를 했다. 옷은 정말 예뻤고 눈물이 날 만큼 꼭  맞았다.

 “선생님, 하나가 가운데 서게 해요. 일부러 특별한 옷 입은 것처럼 보일 거   에요.”

 유미가 호들갑스럽게 말했다.

 “그런데 유미 네 배꼽이 왜 그래? 와하하!”

 아이들의 말에 유미의 얼굴이 빨개졌다. 유미의 참외 배꼽을 보는 순간, 나도 어쩔 수 없이 웃음이 났다.

 “그럼 하나가 가운데 서도록 할까?”

 “하나야, 정말 주인공처럼 보여. 멋지게 해봐!”

 유미가 뒤에 서서 속삭였다. 음악이 흘렀다. 

 ‘주인공처럼? 아니, 주인공답게!’

 난 힘차게 무대로 나서며 사전에 올릴 새로운 문장 하나를 떠올렸다.

<뚱뚱하다는 건 특별한 기회를 만날 수도 있다는 것!>

 

                               *끝*

 

 

출처 : 글나라
글쓴이 : 凡 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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