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자에서 바베큐를.. ( 225회 )
정자에서 바베큐를...
< 2008년 11월 22일, 토요일, 맑음 >
아들이 노루실에 만든 정자를 보러 가고 싶다고 했다.
정자가 완성된 뒤로 한 번도 안 가봐서 궁금한 모양이다.
금요일 저녁에 아내와 셋이 노루실로 들어갔다.
빈 집이라 아파트보다는 썰렁하고 추웠다. 보일러를
틀었지만 콧등이 싸늘하다.
아내는 춥다고 야단이다. 난 노루실이 춥기는 해도
아침에 일어나서 보게 될 경치를 생각하면 그리 춥게 느껴지지
않는다.
아침에 일어나 뽕나무 가지를 잘라 주전자에 넣고 끓였더니
잎을 넣은 것 못지 않게 노란 물이 잘 우러났다.
맛을 보니 훌륭한 뽕잎차다. 뽕나무는 잎과 가지는 말할 것도
없고 뿌리까지 쓸 수 있으니 하나도 버릴 게 없는 나무다.
사람도 그래야 할 것이다. 말이든 행동이든 남에게 책망들을
일이 없도록 조심하고 두루 쓰일 수 있어야 하리라.
아침을 먹고 나무들의 가지를 쳐주었다.
그런 다음에 거실 앞에 있는 꽃밭을 손보았다. 로즈마리가
너무 번성하여 전망을 가리기에 7그루를 모두 파서 마당 둘레에
옮겨 심었다.
꽃밭에는 월악산 윤규집에서 받아온 하늘매발톱과 약초모임에서
얻은 다알리아, 금잔화, 맨드라미 등을 심었다.
로즈마리를 고기 구울 때 넣으면 느끼한 맛이 없다
아들은 점심 때 돼지고기 바베큐를 만들었다.
난 여태 불을 피울 때 라이터를 사용했는데 아들은 마트에서
가스 분사기를 사와서 아주 간편하게 불을 붙였다.
기계를 다루는 면에서는 아들이 나보다 훨씬 더 낫다.
아들은 정자에서 바베큐를 구워 먹는 것이 재미있는 모양이다.
아들이 바베큐를 잘 만들어서 나도 맛있게 먹었다.
아들 덕분에 겨울초를 뿌려 놓은 밭에다 물을 흠뻑
주었다. 나 혼자라면 물뿌리개로 몇 번이나 오가며 물을 주어도
충분한 양을 주지 못했을 텐데 아들은 호스로 편하게 물을 주었다.
나는 일을 힘들게 둘러가며 하는 편이고 아내와 아들은 편하고
빠르게 하는 편이다.
아들이 좋아하는 말티즈
다음날에는 해운대에 있는 장산으로 등산을 갔다.
산을 오르다가 패랭이 군락지를 발견했다.
패랭이 줄기를 보니 씨가 맺혀 있었다. 얼른 비닐 봉지를 꺼내
씨를 받았다.
그전 같으면 예사로 지나쳤을 텐데 씨에 관심을 가진 뒤부터는
허투로 보지 않는다.
한국아동문학인 협회 세미나에 갔을 때도 코스모스, 맨드라미,
참취 등 씨를 받았고, 경주에 가서도 설악초, 맨드라미, 분꽃,
도라지 씨를 받았다.
오늘도 마른 줄기 끝에 달려있는 씨방이 확대경으로 들여다 본
것처럼 눈에 확 들어왔다.
'그래 바로 저게 씨앗이야!'
사람들은 꽃은 좋아해도 씨앗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씨는
길가에 나뒹구는 돌멩이나 다름없다. 떨어져서 싹이 트면 좋고
싹이 안 터도 그만이다.
꽃은 정성들여 가꾸어야 볼 수 있는 것인데도 어느 날 갑자기
피는 것처럼 여긴다.
패랭이꽃의 씨앗
노루실 마당에 꽃이 적었던 것은 내가 씨앗을 제대로 받지
못했기 때문이고, 씨앗을 어디서 구했다고 해도 싹을 제대로
틔우지 못해서 많은 꽃을 볼 수가 없었다.
이젠 조금 알 것 같다. 씨를 어떻게 받는지, 싹을 어떻게
틔우는지, 그 싹을 어떻게 키워가는지를.
꽃의 출발점은 씨앗이다.
모래알보다 작은 씨앗을 눈여겨 보지 않고 그냥 지나친다면
결코 꽃을 볼 수 없을 것이다.
꽃이 화려하게 피었다가 질 때는 황량한 모습이 된다.
씨앗은 그 무렵 맺힌다. 꽃이 지고 줄기가 시들 때
다음 해의 희망인 씨앗이 영그는 것이다.
씨앗이 영그는 이치를 보면 무엇이 제대로 풀리지 않거나
어려운 글이 극에 달하더라도 희망을 잃어서는 안 되겠다.
사람도 재능이 드러나지 않을 때 눈여겨 보고 잘 키워야만
큰 사람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