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창작

[스크랩] [문성희] 푸른 목각 인형 ( 제7회 푸른 문학상 수상작품)

凡草 2009. 9. 2. 23:20

 

글나라 동화창작교실에서 공부하고 있는

문성희씨의  새로운 작가상 수상을 축하합니다!

더욱 정진하기 바랍니다!

 

 

<제7회 푸른문학상 ‘새로운 작가상’ 수상작>
                                            

                                  푸른 목각 인형
                                                                       문  성  희





유진이는 석고상처럼 굳은 얼굴로 기말 고사 문제집을 풀었다. 엄마가 정해 준 분량을 아직 반도 못했다. 더구나 수학 학원에서 어려운 문제를 풀고 왔더니 머리까지 아파 왔다. 밤 11시가 지나자 눈이 슬슬 풀렸다.
“흐으으”
또 신음 소리가 들렸다. 며칠 전부터 들려 오는 소리였다. 유진이는 영문 모를 신음 소리에 몰려 오던 잠이 달아났다. 슬픔이 깊게 밴 소리는 유진이 가슴 속에서 메아리쳤다. 왠지 낯익은 소리 같았다. 가슴이 파르르 아파 왔다.
유진이는 고개를 돌려 방 안을 둘러보았다. 신음 소리가 뚝 그쳤다. 깜빡 졸다 환청이 들린 걸까? 유진이는 고개를 저었다. 다시 문제집을 풀기 시작했다.

그 때였다. 방 벽에 걸려 있던 목각 인형이 푸른 눈동자를 깜박거렸다. 마치 긴 잠에서 깨어났다는 듯이 말이다. 신음 소리는 목각 인형의 입가에서 흘러 나온 것이었다. 목각 인형은 안쓰러운 눈길로 유진이 뒷모습을 훑어보았다. 여러 갈래의 투명한 줄이 유진이 눈에는 물론 어깨, 팔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매달린 줄은 위로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다음 날 학교 수업을 마치고 유진이는 교실 문을 나섰다. 후드득 후드득. 장마철이라 며칠 동안 비가 내렸다. 아침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오후에도 그칠 줄을 몰랐다. 한낮인데도 밖은 어두웠다. 빼빼 마른 유진이는 우산을 꺼내 들었다. 지쳐 보이는 눈으로 낮은 하늘을 쳐다보았다. 단정하게 빗은 단발머리 위로 빗방울이 투두둑 떨어졌다. 우산을 쓰고 막 교문을 나서는데 다영이가 불렀다.
“유진아, 같이 가자.”
다영이는 수학 학원에 같이 다니는 친구다. 작년 5학년 때부터 같은 반이었다. 큰 키에 스키니 진을 입은 다영이는 잔머리를 일부러 빼놓고 머리를 뒤로 질끈 묶었다. 삐쳐 나온 잔머리가 바람이 불 때마다 살랑거렸다.
“이번 주 토요일 오후에 애들이랑 영화 보러 가기로 했는데 너도 갈래?”
“어? 엄마한테 물어 볼게.”
유진이는 언제나 그렇듯 힘없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번엔 꼭 같이 가자.”

6학년이 되자 아이들은 시험이 끝난 날이나 주말에 친구들과 놀이 동산도 가고 영화도 보러 다녔다. 유진이는 그런 친구들이 부러웠다. 유진이 엄마는 가족 말고는 친구들과 가는 걸 한 번도 허락한 적이 없다. 이번에도 보나마나 안 될 게 뻔하다.
다영이와 헤어진 유진이는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갔다.
“우산에서 빗방울 떨어지잖아. 밖에서 털고 오라고 몇 번 말했니?”
얼굴이 비칠 정도로 윤이 나는 현관 바닥 위로 빗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엄마는 못마땅한 얼굴로 유진이를 흘겨보았다. 날카로운 엄마 눈빛에 유진이는 움츠러들었다. 유진이네 집은 바닥에 먼지 하나 없을 만큼 깨끗하다. 엄마는 행주처럼 깨끗한 걸레로 현관 바닥의 물기를 닦았다.  
“유진아, 내일 기말 고사 시험에서 올백 맞아야 해. 알지?”
엄마는 걸레를 빨고 거실 소파에 앉자마자 또 시험 이야기다. 시험 보기 며칠 전부터 엄마는 ‘올백’ 소리를 입에 달고 다녔다.
“저번 중간고사 때 쉬운 수학 문제를 하나 틀려서 엄마가 얼마나 속상했는지 아니?”
‘엄마, 그래도 전체에서 하나 틀린 거예요. 반에서 1등이었다고요.’
유진이는 이렇게 외치고 싶다. 지금까지 유진이는 반에서 1등을 놓친 적이 없다. 하지만 입가에 맴도는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갑자기 눈이 씀벅씀벅하더니 눈꺼풀이 미세하게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눈꺼풀에 줄이 달려 누군가 그 줄을 살살 잡아당기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내일 기말고사 시험 끝나면 바로 수학 경시대회 본선 준비할 거야.”
유진이는 4학년 때부터 특목고를 목표로 하는 전문 수학 학원과 영어 학원에 다녔다. 밤늦게까지 학원 숙제하느라 유진이는 언제나 피곤했다.
“6학년이 왜 중학교 3학년 수학을 배우는 거야? 당신 너무하는 거 아냐?”
늘 파김치가 된 유진이를 볼 때마다 아빠는 엄마에게 한소리를 했다.
“선행 학습을 해야죠. 수학 경시대회에서 상도 부지런히 타야 하고요. 특목고 가기가 그렇게 쉬운 줄 아세요? 우리 유진이가 얼마나 잘 따라가는데 뭐가 걱정이에요?”
엄마는 단단한 철옹성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싫어요, 전 애초부터 수학 경시대회 나가기 정말 싫었어요. 왜 내 생각은 묻지도 않고 뭐든 맘대로 하세요?’
유진이는 엄마에게 진심을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포기했다. 말해도 소용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5학년 때 엄마는 유진이에게 한마디 말도 없이 영어인증시험을 신청해 놓았다. 주말마다 영어 학원에 다니면서 준비하면 된다고 했다. 주말까지 학원을 다녀야 한다고 생각하자 유진이는 화가 났다. 그때 처음으로 유진이는 엄마 말을 듣지 않았다.
그 뒤 엄마는 일 주일 넘게 유진이에게 꼭 필요한 말만 했다. 얼굴도 마주치혀 하지 않았다. 한 집에 살면서 서로 본체만체하고 지내야 하는 고통이란 차라리 심한 잔소리를 듣는 것보다 훨씬 모질고 견디기 힘들었다. 말 없는 엄마 뒷모습을 볼 때마다 유진이는 불안했다. 엄마는 냉정하고 매서웠다. 결국 유진이는 주말에도 영어 학원을 다녔다.
그 뒤로 유진이는 지금까지 엄마를 이긴 적이 한 번도 없다. 엄마는 여전히 유진이 생각은 들어 보지도 않고 뭐든 맘대로 결정해 버렸다. 그럴 때마다 유진이는 마음 깊은 곳에서 뜨거운 것이 치솟아 올랐다.

유진이는 또다시 눈까풀이 깜빡거렸다. 고개를 푹 숙였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힘을 주었다. 하지만 유진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자꾸만 눈까풀이 깜빡거렸다.
“얼른 들어가서 시험 공부해.”
엄마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유진이는 온몸에 힘이 쑥 빠진 채 방으로 들어갔다.
“공부 잘 되니?”
얼마 뒤 엄마는 간식을 가지고 유진이 방으로 들어왔다. 엄마는 책상에 주스와 샌드위치를 놓고 나가려다 방 벽에 걸려 있는 목각 인형을 바라보았다. 목각 인형은 커다란 주머니가 달린 자주색 치마를 입고 기다란 줄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볼수록 예쁘다니까. 줄을 잡아당기면 원하는 대로 막 움직이는 것 좀 봐.”
엄마는 방 벽에 걸린 목각 인형을 집어 들더니 줄을 잡았다 놓았다 했다. 목각 인형은 엄마가 조종하는 대로 움직였다. 유진이는 어렸을 때부터 인형을 좋아했다. 목각 인형은 아빠가 며칠 전에 해외출장에 다녀오면서 사 온 인형이다.
유진이는 학원을 갔다 와서 오후 내내 시험 공부를 했다. 오늘은 아빠가 일찍 퇴근했다. 저녁을 먹고 유진이는 모처럼 아빠와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유진아, 9시부터 시험 공부해야지?”
엄마는 시계를 흘끔 보며 거실 탁자에 참외를 놓았다.
“아니, 이 밤에 또 뭘 한다고 그래?”
아빠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내일이 기말 시험이에요. 이번엔 꼭 올백 맞아야 한다니까요.”
“유진이 얼굴 좀 봐. 피곤해서 벌써 눈이 풀렸잖아. 올백 안 맞아도 돼. 애한테 스트레스 주지 말라고.”
“다 저를 위해서 그러는 건데요 뭘.”
유진이는 시무룩한 얼굴로 방에 들어갔다. 책상 위에는 기말 고사 문제집이 놓여 있었다. 문제를 푸는 동안에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유진이는 밤늦게까지 시험 공부를 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상한 신음 소리가 또 들려왔다. 하지만 유진이가 뒤를 돌아보면 어느 새 소리는 뚝 그쳤다. 유진이는 시험이 코앞이라 그냥 흘려 보냈다.

다음 날 2교시 수학 시험 시간이었다. 유진이는 수학 시험지를 받아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한 문제도 실수하면 안 돼!’
엄마 목소리가 귓가에 생생하게 들려왔다. 돌덩이를 삼킨 것처럼 가슴이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눈까풀이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심하게 깜빡거렸다. 눈이 깜빡거릴 때마다 수학 문제들도 깜빡거렸다. 머리까지 아파왔다. 유진이는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얼마쯤 시간이 지난 걸까? 유진이는 살며시 눈을 떴다. 벌써 문제를 다 풀고 책상 위에 엎드려 있는 아이들도 있었다. 유진이는 아직 반도 못 풀었는데 가슴이 방망이질하기 시작했다. 서둘러 문제를 풀었다. 시간이 없어서 세 문제나 못 풀었다. 아무렇게나 답을 쓰고 시험지를 내고 말았다.

유진이는 기말 시험을 마치고 집으로 갔다. 발끝만 내려다보며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옮겼다. 집 근처에 다다르자 유진이의 걸음이 더디어졌다. 유진이는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엄마는 다영이 엄마와 거실에서 차를 마시고 있다.
“유진아, 시험 잘 봤니?”
엄마가 식탁에 빵과 우유를 놓아 주며 물었다.
“보나마나 이번에도 1등이겠지. 유진이 엄마는 얼마나 좋아?”
다영이 엄마는 부러운 눈길로 엄마를 바라보았다. 엄마는 입술 끝을 살짝 올리며 빙긋 웃었다. 유진이는 아무 말 없이 식탁에 앉아 빵을 먹었다.
“다영이 엄마, 수학 학원에서 사고력 수학은 안 다루잖아. 사고력 수학도 같이 하면 좋대. 이번 주말부터 유진이 보내려고. 다영이도 같이 보낼래?”
엄마는 ‘사고력 수학’이라는 전단지를 다영이 엄마에게 내밀었다.
“얼마 전에 경시대회에서 본선 진출했다더니 이제 올림피아드 상까지 받으려고? 유진이가 반에서 온 상을 다 휩쓴다며? 다영이는 수학 숙제도 자꾸 밀리고 말도 잘 안 들어.”
“시키면 다 한다니까.”
“우리 다영이가 유진이 반만 닮아도 좋을 텐데……. 다영이 왔겠다. 나 그만 가 볼게.”
다영이 엄마는 현관문을 나섰다. 유진이는 빵을 든 손에서 힘이 스르르 빠져나갔다. 엄마는 수학 학원만으로도 부족해 뭘 또 하나 시킬 모양이다. 평일도 모자라 이제 주말까지 학원 스케줄로 꽉 차 있다.

유진이는 마음이 무거웠다. 마치 커다란 바위가 가슴 속에 들어 앉아 있는 것만 같았다. 어차피 엄마 마음대로 할 거니까 유진이는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더군다나 이번 기말 고사 수학 시험이 걱정이었다.
‘엄마가 알게 되면 어쩌지?’
유진이는 가슴이 또 답답해져 왔다. 또다시 눈까풀이 깜빡거리더니 이번에는 오른쪽 어깨가 갑자기 조금씩 위아래로 움직였다. 어깨에도 줄이 생겨 누군가 그 줄을 잡아당겼다 놓았다 하는 것만 같았다. 유진이는 어깨를 움켜잡고 서둘러 방으로 들어갔다.
다음 날 4교시 수학 시간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갑자기 유진이의 왼쪽 어깨가 위아래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유진이는 한 손으로 어깨를 꽉 움켜쥐었다. 이번에는 오른쪽 어깨마저 위아래로 움직였다. 유진이의 양쪽 어깨가 저절로 위아래로 움직였다. 유진이는 고개를 푹 숙이고 마른 침을 삼겼다. 깊이 심호흡을 했다. 선생님은 의아한 눈빛으로 유진이를 바라보았다.
“유진아, 왜 그래?”
유진이 뒷자리에 앉은 다영이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어, 나도 모르겠어…….”
유진이는 어쩔 줄을 몰랐다.
4교시가 끝났다. 유진이는 급식을 먹고 다영이와 운동장 벤치에 앉았다.
“유진아, 너 수학 시간에 왜 그런 거야?”
다영이는 유진이 얼굴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도 몰라.”
유진이는 힘겹게 말을 이었다.
“도대체 뭐 때문에 눈까풀이 자꾸만 깜빡거리고 어깨가 움직이는 건지 모르겠어.”
유진이는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멈출 수가 없었다. 다영이는 그런 유진이가 안쓰러웠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에 오자 엄마는 간식을 해놓고 유진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유진이는 식탁에 앉아 간식을 먹으면서 엄마에게 자기 마음을 솔직히 털어놓고 싶었다. 수학 시험 이야기며 자꾸만 몸이 이상하다고 말이다.
“엄~마.”
유진이는 나지막이 엄마를 불렀다. 그 때 전화벨이 울렸다. 엄마가 전화를 받았다. 다영이 엄마였다.
“유진이가 눈을 자꾸 깜빡이고 어깨도 저절로 움직인다는 데 그거 틱 장애 같아. 병원에 한번 가봐.”
“뭐라고? 틱 장애?”
엄마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응, 우리 조카도 그랬거든. 그게 초기 증세래. 바로 병원에 가면 괜찮대. 조카도 지금은 멀쩡해.”
엄마의 얼굴빛이 점점 어두워졌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유진이가 요즘 공부하느라 힘들어서 그럴 거야.”
엄마는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애써 태연한 척 웃음을 지어 보이며 식탁으로 왔다.
“유진아, 요즘 공부하느라 힘들지? 엄마가 보약 한 재 지어 와야겠다. 수학 경시대회가 며칠 안 남았으니까 열심히 해.”
유진이는 다시 마음이 답답해졌다. 그 날 밤늦게까지 수학 학원 숙제를 했다. 아직도 반도 못했는데 벌써 밤 11시다. 유진이는 수학 문제를 푸는데 마치 바늘로 후비듯 머릿속이 쩌릿쩌릿했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문득 방 벽에 매달려 있는 목각 인형이 보였다. 가슴이 무거운 바위에 눌린 듯 답답했다.
목각 인형을 보자 갑자기 이상하게 눈이 깜빡거리고 어깨가 움직였던 게 떠올랐다. 유진이는 자신의 눈을 만져 보고 어깨도 더듬어 보았다.
유진이는 자기도 모르게 연필꽂이에 꽂혀 있던 가위를 집어 들었다. 목각 인형에 매달린 줄을 가위로 싹둑 잘랐다. 목각 인형이 바닥에 투두둑 떨어졌다. 유진이 가슴속에 웅크리고 있던 답답함이 머리 뒤로 스윽 빠져 나갔다.
하지만 유진이는 덜컥 겁이 났다. 갑자기 엄마가 방에 들어와 왜 그랬냐고 혼을 낼 것만 같았다. 유진이는 마른 침을 꿀컥 삼켰다. 갈증이 났다. 유진이는 부엌으로 가 정수기에서 냉수를 받아 마셨다.

유진이는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갔다. 유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숨 쉬는 것까지 잊은 듯 입을 쩍 벌린 채 눈앞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유진이 방이 푸르스름한 빛에 덮여 있다. 그 빛은 이른 새벽의 푸르스름한 하늘을 닮았다. 방바닥에 떨어져 있던 목각 인형이 보이지 않았다. 툭툭 잘린 줄만이 널려 있을 뿐이었다. 책상 앞 창문이 사라지고 푸른 길이 나 있었다. 푸른 길을 따라 목각 인형이 걸어가고 있었다.
유진이는 자기도 모르게 목각 인형을 따라갔다. 한참을 가자 길 옆으로 똑같은 모양의 집들이 서 있다. 유진이는 잠시 서서 그 집들을 바라보았다. 어떤 집 문이 열려 있다. 유진이는 그 집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수학 학원이었다. 칠판에는 어려운 수학 문제가 가득 적혀 있었다. 아이들은 아무런 표정 없는 얼굴로 문제를 풀고 있었다. 유진이는 깜짝 놀랐다. 아이들 어깨와 팔에 기다란 줄이 매달려 있었다. 유진이는 서둘러 그 곳을 빠져나왔다.
유진이는 목각 인형이 어디에 있는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길가에는 끝없이 이어진 학원들만 보였다. 유진이는 단단히 버티고 선 학원들이 마치 커다란 벽처럼 느껴졌다.
유진이는 푸른 길을 따라 다시 걸어갔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목각 인형은 보이지 않았다. 길모퉁이를 돌자 아담한 집이 보였다. 유진이는 그 집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둥근 창 밖으로 오렌지색 불빛이 밝게 흘러 나왔다.
그 집에서는 무어라 표현하기 어려운 신음 소리가 울려 나왔다. 귀에 익은 소리였다. 그 소리는 며칠 전부터 밤마다 들려 오던 신음 소리였다.
유진이는 그 소리에 이끌려 문을 열고 살그머니 집으로 들어갔다. 집 안에는 목각 인형들이 벽에 줄줄이 매달려 있었다. 신음 소리는 목각 인형들의 입가에서 흘러 나왔다.  
“왜 그래? 어디 아픈 거니?”
유진이는 머리를 가지런히 땋아 내린 목각 인형에게 물었다.
“이 줄 때문에 아무것도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어. 게다가 줄이 점점 굵어지고 있어. 줄을 그대로 두면 마음에도 줄이 생겨.”
“뭐라고? 마음까지?”
유진이는 목각 인형들이 안쓰러웠다.
“너무 오랫동안 줄에 매달려 있어서 줄을 끊는 방법까지 잊어버렸어.”
“나도! 나도! 어서 이 줄을 잘라줘.”
목각 인형들이 여기저기서 아우성쳤다.
“기다려 봐. 내가 집에 가서 가위 가져올게.”
유진이는 집 밖으로 나왔다. 문 앞에 목각 인형이 서 있었다. 유진이가 따라 나선 그 인형이었다. 목각 인형은 빙그레 웃더니 자주색 치마에 있는 커다란 주머니에서 가위를 꺼내 유진이에게 주었다.
유진이는 가위를 들고 집으로 들어갔다. 유진이는 목각 인형들의 줄을 가위로 잘랐다. 유진이 얼굴에 땀이 흥건했다. 손바닥에도 땀이 찼다.
“조금만 더 참아. 얼른 잘라 줄게.”
유진이는 힘든 줄도 모르고 줄을 톡톡 잘랐다.
줄이 끊어질 때마다 목각 인형들은 사뿐히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아, 이제 살았어.”
목각 인형들이 벅찬 마음으로 말했다.
“저 줄에 매여 있을 때 난 내 자신을 느낀 적이 한 번도 없었어. 고마워.”
머리를 가지런히 땋아 내린 목각 인형이 말했다.
유진이 얼굴에 살포시 웃음꽃이 피었다. 유진이는 목각인형들과 헤어져 집으로 향했다. 목각 인형들이 길모퉁이까지 나와 손을 흔들어주었다.

유진이는 끝없이 이어진 학원들이 서 있는 길을 지나갔다. 갑자기 학원 문들이 덜컹 열리더니 기다란 줄들이 스르르 기어 나왔다. 유진이는 가슴이 쿵쾅쿵쾅 울리기 시작했다. 줄들은 유진이를 향해 다가왔다. 굵은 줄 하나가 유진이 오른쪽 어깨로 다가왔다. 이번에는 왼쪽 어깨에도 다가왔다. 유진이는 힘껏 도망쳤다. 굵은 줄들이 계속 따라왔다. 유진이는 줄에서 벗어나려고 마구 달렸다. 달리는 내내 발이 땅에 닿는지 의식하지 못했다. 발이 돌부리에 걸려 땅바닥에 넘어져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다시 일어나 헐떡거리며 계속 달렸다. 두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저 멀리 유진이 방이 어슴푸레 보였다. 유진이는 뒤를 돌아보았다. 아직도 굵은 줄이 쉭쉭 소리를 내며 따라왔다. 유진이는 기절할 정도로 아찔했다.
‘안 돼!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해.’
유진이는 숨을 크게 내쉬고 힘껏 달렸다. 마지막까지 힘을 내서 방으로 들어갔다. 스르륵 길이 사라지더니 방벽이 세워지고 예전처럼 창문이 생겼다. 유진이는 침대 위로 고꾸라지면서 점점 정신을 잃었다. 얼마만큼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창 밖으로 부옇게 날이 밝아왔다.
“유진아, 괜찮니? 온 몸이 불덩이네.”
잠결에 어렴풋이 아빠 말소리가 들렸다.
“오늘 학교 보내지 말고, 하루 푹 쉬게 해.”
아빠는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말하고 출근했다. 엄마는 수건에 물을 적셔 유진이 이마에 덮어 주었다. 서둘러 담임선생님에게 전화를 했다.
“네? 유진이가요? 틱 장애요?”
엄마는 가슴이 쿵쾅거렸지만 애써 태연스레 말을 이었다.
“그럴 리가 없어요. 좀 쉬면 괜찮아질 거예요. 오늘 집에서 푹 쉬고 월요일 날 보낼게요.”
엄마는 전화를 끊자마자 어딘가로 또 전화를 했다.
“민경이 엄마, 나 유진이 엄마. 전에 유명하다는 한의원 전화번호 좀 가르쳐 줘. 유진이 보약 한 재 지어 먹이려고.”
점심때쯤 유진이는 살며시 눈을 떴다. 열도 내리고 몸이 한결 가벼워졌다. 유진이는 일어나 침대에 기대어 앉았다. 목각 인형은 줄이 잘린 채 방바닥 한구석에 널려 있었다. 유진이는 화장실에 가서 세수를 했다.
“유진아, 이제 괜찮니?”
언제 왔는지 엄마가 화장실 문으로 고개를 빠끔히 내밀며 말했다. 유진이는 말없이 고개만 끄떡였다.
“네가 좋아하는 전복죽 끓였어. 어서 먹어.”
엄마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유진이는 식탁에 앉아 전복죽을 먹었다. 식탁에는 사고력 수학 학원 전단지가 놓여 있었다.
“그럼, 오후에 사고력 수학 학원에 가도 되겠네.”
엄마는 애써 다정하게 말했다. 유진이는 마음이 뒤죽박죽 혼란스러웠다. 순간 바싹 다가오던 굵은 줄이 떠올랐다. 온몸이 꽁꽁 묶인 듯 가슴이 죄어 오는 동시에 일 주일 동안 말 한 마디 하지 않았던 엄마의 싸늘한 모습이 머릿 속에 스쳐 지나갔다.
“오늘이 사고력 수학 첫 시작 날이라 다음 주에 가면 한 주 빠지잖아?”
그 때 전화가 왔다. 다영이 엄마였다.
“아니, 별일 아니야. 열이 좀 났는데 이젠 괜찮아. 다영이 사고력 수학 학원 보낼 거야?”
“다영이가 다니기 싫대. 오늘 시험 끝났다고 오후에 친구들이랑 영화 보러 간대.”
엄마는 한참 동안 다영이 엄마와 통화를 했다.
“오늘 시험 점수 알려 주었다고?”
엄마 얼굴이 봄날 와락 피어나는 살구꽃처럼 환해졌다.
“뭐라고? 민경이가 1등…….”
순간 엄마 얼굴이 어두워지더니 말을 잇지 못했다. 유진이는 들고 있던 숟가락을 힘없이 식탁 위에 놓았다. 엄마는 전화를 끊고 나서 거실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유진이는 돌처럼 굳어 있을 엄마 얼굴을 떠올렸다. 입술이 바싹 타 들어갔다.

“어떻게 된 거니?”
엄마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식탁으로 와서 물었다. 유진이는 작지만 단호한 엄마 목소리가 더 무서웠다. 차라리 화가 나면 소리를 지르거나 혼을 냈으면 좋겠다. 하지만 엄마는 언제나 저랬다. 유진이는 항상 그런 엄마를 바라보는 것조차 힘들었다. 마치 피부가 오그라드는 것처럼 두려웠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유진이는 마음 속에 꿈틀거리는 어떤 힘이 솟아났다. 마치 물살을 거슬러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말이다. 유진이는 천천히 눈까풀을 밀어 올리고 엄마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날 수학 시험 볼 때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뿐만 아니었다. 마음 속에 꾹꾹 눌러둔 말까지 쏟아 냈다.
“나, 수학 경시 대회 나가기 싫어요!”
유진이는 힘껏 소리쳤다. 이렇게 크게 소리를 지른 건 처음이었다. 유진이는 부르르 입술을 떨었다.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당장이라도 주르륵 흘러내릴 것 같았다.
“뭐, 뭐라고?”
엄마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 동안 엄마가 시키는 대로 하는 거 정말 힘들었어요. 시험 끝났으니까 오후에 다랑이랑 영화 보러 갈 거예요.”
마음 속에 담아둔 말을 하고 나자 목구멍까지 올라온 울음이 툭 터졌다. 유진이는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크게 울었다. 걱정되지도 않았다. 속이 후련했다. 엄마의 얼굴이 뻣뻣하게 굳어왔다. 싸늘한 눈빛으로 유진이를 쏘아보더니 안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마 엄마는 오랫동안 유진이를 본체만체 할 것이다. 하지만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답답했던 가슴이 서서히 뚫리는 것 같았다. 유진이는 쫒아오던 굵은 줄들이 점점 희미해지는 것만 같았다.








문  성  희
1969년 전남 고흥에서 태어나 숙명여자대학교 한국사학과를 졸업했다. 어린이책 작가교실을 수료했고, 동화창작 모둠에서 동화를 공부하며 열심히 쓰고 있다..  

출처 : 글나라
글쓴이 : 凡 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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