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범초산장 일기; 610회) 군고구마와 치자차
(범초산장 일기; 610회)
군고구마와 치자차
<2014년 11월 30일, 일요일, 흐리고 비>
11월 마지막 날이다. 금요일에도 비가 오더니 오늘도 비가 내렸다. 비오는 날에는 난로를 피워 고구마를 구워 먹으면 제격이다.
호박고구마를 구워 놓으니 속이 노랗다. 군고구마 색깔을 보니 치자차를 마시고 싶었다. 마침 산장에서 치자를 땄다. 한 봉지 땄는데 열매 네 개를 주전자에 넣고 끓였더니 빛깔 좋은 차가 되었다.
치자차는 열을 내려주고 홧병에 좋은 차다. 결막염이나 초조하고 잠이 오지 않을 때도 좋고 목감기로 목이 부었을 때도 마시면 도움이 된다.
범초산장에서 곰국을 끓여 먹었다. 자주 해먹기는 힘들고 일 년에 한두 번 해 먹는다. 뜨거운 곰국에 표고버섯을 잘라서 넣었더니 잘 어울렸다.
삼잎국화와 초석잠 뿌리를 캐었다. 겨울에는 약초 잎이 없으니 뿌리를 캐어서 끓여 마시면 된다. 삼잎국화 뿌리는 털이 많고 초석잠 뿌리는 골뱅이처럼 생겼다. 초석잠에는 두뇌를 활성화하는 물질이 많이 있어서 치매에 좋다. 머리를 많이 쓰는 사람들에게 아주 좋은 차다.
초석잠 뿌리를 캐고 있는데 저수지에 낚시질 하러 왔던 사람이 붕어를 잡아서 안 가져 가고 나한테 주었다. 나는 산장 앞마당이 저수지라도 낚시질을 해본 적이 없다. 걷는 것은 좋아해도 죽치고 앉아서 고기 잡는 것은 좋아하지 않는다. 공짜로 받은 붕어를 쪄서 초장에 찍어 먹었더니 먹을만 했다.
난로에 불을 피우는 것은 이제 일도 없다. 그 전에는 불을 피우느라 애를 먹었는데 토치 사용법을 익힌 뒤에는 손바닥 뒤집는 것만큼이나 쉽다. 토치를 부탄가스 통에 연결하는 것이 쉽지 않았는데 자꾸 해보니 한 번 만에 돌려서 끼울 수 있다. 토치로 신문지에 불을 쏘아대면 나무에 바로 옮겨 붙는다. 무엇이든 처음에는 서툴지만 숙달되면 손쉬워진다.
산장 계곡물은 비가 낙엽을 다 쓸어가 버렸다. 낙엽 팩을 떼고 나니 해맑은 얼굴이 되었다. 저 물에 세수를 하면 내 얼굴도 깨끗해질까? 일부러 찬물에 세수를 하였다.
아직도 피어 있는 국화
노랗게 물든 보리수
사철나무 열매
늦가을 답지 않게 소복한 쑥
녹차나무 꽃이 계속 피고 있다
여기는 남쪽이라 그런지 아직도 초록색 잎들이 많다. 오늘도 참 포근했다. 겨울이 거북이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다. 올해는 늦가을이 참 길다.
산장에 까마중 열매가 있어서 후식으로 따먹었다. 참 줄기차게 열린다.
산장에 갈 때마다 무를 몇 개씩 뽑아 먹는 재미도 쏠쏠하다. 너무 촘촘하게 심어서 무가 썩 크지는 않지만 맵지 않고 단맛이 나니 맛있게 먹는다.
배추는 벌레가 먹긴 했어도 거의 다 살아남았다. 알이 덜 찬 것들은 밭에 그대로 두었다가 쌈배추로 먹고 알이 찬 것만 다음 주에 김장을 해야겠다.
오늘 세어보니 크기는 파는 것보다 작긴 해도 약 40포기나 되니 김장은 충분하겠다. 주인 없이 잘 커준 배추가 고맙다. 농약과 화학 비료를 쓰지 않고 키워서 달달할 것이다.
목련은 잎을 떨어뜨리면서 내년 봄을 기약하고 있다. 새봄에 피울 꽃봉오리가 벌써 봉긋하다. 내가 기다리는 봄이 저 속에 다 들어 있다.
산장에서 점심을 먹고 석산리 범초텃밭으로 갔다. 오늘은 파드득 나물과 초석잠 모종을 심었다. 내가 적금을 붓듯 매주 무엇이든 심어 나간다. 텅 빈 밭에서야 거둘 것이 있겠는가? 무엇이든 채워 나가야 한다. 파드득 나물과 초석잠을 심고 나서 돌아보니 후박나무도 살아난 것 같다.
11월 들어서 뿌린 유채씨가 제법 돋아났다. 밭을 늦게 사서 씨를 제 철에 뿌리지 못했는데도 잘 나오고 있다. 늦으면 어떠랴? 무슨 일이든 늦으면 늦는대로 최선을 다하면 된다. 안 하는 것보다는 늦게라도 하는 것이 낫다. 나는 늦어서 못한다는 말을 싫어한다. 빨리 하면 좋지만 늦더라도 해야 한다.
11월 2일에 심은 양파도 비가 오니 다 살아났다. 잎이 새파란 걸 보니 이제 죽지는 않겠다. 나는 얼치기 농부지만 심어만 놓으면 밭이 어머니 손길로 다 살려낸다.
지난주에 심은 블랙베리도 자리를 잘 잡았는지 궁금하다. 땅속에 전화를 걸어보고 싶을 만큼. 저 애들이 살아 있는지는 봄이 되어보아야 알 것이다. 죽든 살든 나는 계속 심어나갈 것이다. 내가 땅에 부어나가는 적금은 초록 통장에 잔고로 남는다. 봄이 되면 나물 적금을 탈 것이다. 현금 천 만원이 부럽지 않은. 생명 적금 통장. 오늘도 가랑비를 맞아가며 적금을 붓고 손바닥에 초록 통장 확인을 받아왔다. 황토색 도장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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