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범초산장 이야기 913회) 팥죽을 먹으며...
2018년, 12월 26일, 수요일, 맑음
(범초산장 이야기 913회) 팥죽을 먹으며...
12월 22일 동짓날 범초산장에 들어가다가 가까운 곳에 있는 홍법사에 들렀다. 홍법사는 정원이 아주 넓어서 어지간한 수목원 못지 않다. 마침 동짓날이라 팥죽을 먹으려는 사람들로 붐볐다.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 차례가 되어 유여사와 함께 받았다. 팥죽을 먹으려고 안으로 들어갔더니 좋은 글이 붙어 있었다.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고, 내 덕행으로는 받기가 부끄럽네. 마음의 온갖 욕심 버리고 육신을 지탱하는 약으로 알아 도업을 이루고자 이 공양을 받습니다.>
나는 불교 신도는 아니지만 그 글이 마음에 와 닿았다. 종교를 갖고 있든 안 갖고 있든 밥을 먹을 때마다 떠올려보면 좋은 내용이다.
자기가 일한 값으로 밥을 먹지만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은 잘못되었다. 이 밥을 먹기까지 수고한 모든 분들과 아파서 밥을 못 먹는 이들도 생각하면 참으로 감사하다. 건강한 몸으로 밥을 먹을 수 있는 것은 큰 행운이다. 과식하지 말고, 맵고 짠 음식을 피해야 할 것이며, 감사한 마음으로 꼭꼭 씹어 먹어야 하리라.
유여사와 함께 팥죽을 맛있게 먹었다. 동지. 그 길고 긴 밤을 팥죽 먹고 힘을 얻어 잘 념겼다.
23일 일요일에는 아들과 세희가 우리집으로 피신을 왔다. 은우와 정미가 독감에 걸려서 온 가족이 고생할까 봐 분산했다. 작년 이맘때도 아들 가족 모두가 독감에 걸려 일주일 이상을 고생했다나. 그래서 이틀 동안 우리 집에 있다가 돌아갔다. 낮에는 아들과 함께 성지곡 숲길을 함께 걷고 저녁에는 수궁횟집에 가서 회를 먹었다. 아들과 같이 먹으니 한결 맛이 있었다.
큰딸 가족도 미국에서 크리스마스를 잘 보냈다.
25일 크리스마스에는 대학 친구들과 금곡동에서 화명수목원까지 세 시간을 걸었다. 내가 길을 안내했더니 좋은 코스라고 칭찬했다. 친구들과 산길을 걷고 점심까지 맛있게 먹었다.
범초산장에 할미꽃이 한 포기 있었는데 재작년 봄부터 안 보였다. 작년에 다시 사다 심었지만 관리를 잘못해서 죽어 버렸다. 봄에 할미꽃이 없으면 봄을 맞는 것 같지가 않다. 그래서 내년 봄에 할미꽃을 보려고 모종을 샀다. 정선에 있는 아우라지 농원에서 33000원을 주고 동강할미꽃 모종 6포기를 택배로 받았다. 이번 주말에 가서 심어 놓을 작정이다.
천안에 사는 동시인 유미희씨가 새 동시집을 펴냈다. 감사하게도 나에게 보내주어서 즐겁게 읽었다. 수준 높은 동시들이었다. 그 중에 3편을 소개한다.
<할머니의 우화> 유미희
눈 뜨고도 몇 시나 됐는지 묻던 까막눈 우리 할머니
맨날맨날 새벽부터 마늘 캐고 콩 심으며 한글 학교 다니시더니
거뜬히 김간난, 이름도 쓰신다 살아온 일들 시로도 지으신다 “우리 똥강아지, 사랑해!” 어제는 삐뚤빼뚤 내게 편지도 써 주셨다
누에가 나방으로 날아오르듯 까막눈 껍질을 벗고 환한 세상으로 나오시는 데 꼬박, 일흔아홉 해 걸렸다.
<농사> 유미희
할머니가 수확했다고 보내 왔어 쌀 한 가마니, 더덕 두 묶음, 고춧가루 열 근, 감 한 자루……
나도 한 해 공부 농사 수확해서 엄마한테 알렸어 수학 75점, 국어 100점, 사회 95점, 과학 90점, 영어 95점……
할머니가 망쳤다는 콩 농사는 “내년엔 잘되겠죠.”라고 넘어가시던데 내 말은 안 통한다
엄마는 족집게 학원 찾아내 겨울 방학 내내 수학 농사 잘 짓는 법을 배우래
갈까? 말까?
<그늘 방석> 유미희
매미 우는 날 나무가 몸속에서 돌돌 말아 두었던 동그란 방석을 꺼냈다 둘둘 말아 두었던 널따란 방석을 펼쳤다
나무가 지금도 짜고 있는 그늘 방석에 앉아 5학년들은 단소를 불고 우리들은 그림을 그린다
그 옛날 아이들은 이곳에서 무엇을 했을까?
나무가 400년째 짜고 있는 그늘 방석에 앉아 내 마음은 먼 옛날 아이들 틈으로 달려간다.
영화 <프로포즈데이>를 재밌게 보았다. 아일랜드 풍광을 덤으로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에이미 아담스가 주연을 맡았는데 의사인 남친이 병원 일로 바빠서 청혼을 하지 않자 직접 청혼을 하려고 아일랜드로 달려갔다가 된통 고생을 한다. 거기서 만난 남자와 사사건건 티격태격하는데 나중에는 마음이 맞게 된다. 갈등을 어떻게 버무려 놓았는지를 눈여겨 볼 만 했다. 사랑이란 결국 숨겨놓은 마음이 아니라 밖으로 펼쳐놓은 행동이다.
휴일이 많아서 영화를 여러 편 보았다. 작품성이 좋은 영화는 아무리 보아도 질리지 않는다. 일본 영화 <기적: 그날의 소비토>도 좋았다. 내과 의사인 아버지가 두 아들에게 의사가 되라고 강요하는데 큰아들은 음악을 하겠다고 우기다가 얻어맞고 집을 나간다. 둘째 아들도 음악적인 소양이 있었지만 아버지 눈치를 보다가 재수 끝에 치과 의사가 되려고 치대에 들어간다.
그런데도 음악적인 재능은 둘째가 더 있어서 음반을 내고 큰 반응을 얻는다. 그래도 아빠 희망을 저버리지 못하고 취미로 음악을 하겠다는 둘째.
나는 이 영화를 보고 뭐 저런 아빠가 다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 인생은 자기가 결정해야지 부모가 살아주는 게 아니다. 부모 눈치 볼 필요 없이 하고 싶은 것은 다 해봐야 한다. 나는 아들 딸들에게 강요하지 않고 제 갈길 가라고 내버려두었다. 가만히 지켜보고 격려하는 게 부모의 도리다.
장예모 감독의 중국 영화 <집으로 가는 길>은 스토리도 괜찮았지만 가을 풍경이 환상적이었다. 그냥 단풍 든 풍경만 보고 있어도 행복했다. 장쯔이 주연의 영화인데 선생님을 사랑한 처녀의 이야기였다. 현재 일은 흑백으로 과거 회상 장면은 컬러로 만든 것도 특이했다. 거장이 만든 영화답게 품격이 있는 영화였다. 공들여 만든 영화를 싼값으로 다운 받아서 보자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좋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 애쓰는 감독들에게 감사드린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