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집

[스크랩] 93편 *** 첫날 밤

凡草 2005. 7. 29. 11:17

        < 첫날 밤 >
  7월 27일  수요일  구름 
 학원 수업을 마치고 6시 45분경 밀양 운정리로 떠났다.
 미국으로 여행을 떠나기 전에 시골집을 돌보기 위해서였다.
  < 마당에서 보이는 앞산 모습 >


시골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막내딸 봉현이도 같이 갔다. 아들은 지금 혼자서 오토바이를 타고 여행을 떠났는데 서생-경주-포항-화진을 거쳐 충주까지 올라갔다가 밀양으로 오겠다고 했다. 그래서 미국으로 시집 간 큰 딸 빼고는 네 식구가 모두 운정리에 모이게 된 셈이다. 거기다가 우리집 개 말티즈종인 <하늬>까지 가서 그야말로 가족 총출동이었다. 가면서 보니 운정리로 들어가는 밀양시 끄트머리에 전자제품을 파는 하이마트도 있고 대형 할인마트도 있어서 2년 뒤에 이사와서 살아도 전혀 불편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다가 저녁을 사 먹고 운정리로 들어가는 입구에 도착하니 벌써 밤이었다. 도시처럼 가로등 불빛이 환하지 않고 어두컴컴하였다. 봉현이는 주위가 어둡고 지저분한 냄새도 나자 시골이 싫다고 아우성을 질렀다. "난 이런 데가 싫어~~!" "너도 나처럼 사회 생활도 해보고 사람 사이에서 시달려봐라. 복잡한 도시가 싫어질 거다. 조용하고 아늑한 시골이 얼마나 좋은데......" 내가 한 마디 했지만 아직 세상을 살아보지 않은 그 애가 무엇을 알겠는가? 자기가 직접느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일이다. 운정리 <범초 산장>에 도착하여 대문에 잠궈 놓은 열쇠를 열고 차를 마당 안으로 몰고 들어갔다. 마당이 넓으니 차는 여러 대를 대어도 공간이 충분하다. 모기향으로 피워 놓으니 모기는 별로 없는데 파리들이 제법 많아서 귀찮았다. 나는 그 정도로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봉현이는 파리들을 보고 또 비명을 지른다. 아무래도 다음에 아이들은 구포나 만덕 쪽에 원룸을 하나 얻어주는 게 좋을 듯 하다. 11시쯤이 되니 아들 문현이가 스쿠터를 몰고 찾아왔다. 아들은 딱 한 번 와보았는데 시골 집을 잘 찾아왔다. 충주에서 대구를 거쳐 밀양으로 왔다고 했다. 혼자 2박 3일 동안 텐트를 치고 밥을 해 먹어가며 돌아다니느라 오토바이 뒤에는 짐이 그득했다.

 아들이 이젠 제법 많이 큰 것 같아 대견스러웠다.

 

    < 의젓해진 아들 >



 작년에는 자전거를 타고 동해안을 한 바퀴 돌겠다며 큰 소리를 치고 떠났는데 겨우 서생까지 나가 떨어지고 말았다. 한나절이나 걸려 서생까지 갔는데 몸도 피곤한데다  서생에 사는 친구를 만나 술을 잔뜩 마시고는 도저히 더 못가겠다며 기권을 해버린 것이다. 나는 그때 아들에게 핀잔을 많이 했었다. 사나이가 한 번 하겠다고 칼을 뽑으면 모기라도 한 마리 잡고 칼을 넣어야지 겨우 그 정도로 그치면 되느냐고.
그런데 올해는 충주 월악산까지 갔다왔다니 많이 어른스러워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현이는 내일 비가 올 것 같다는 일기 예보 때문에 운정리에서 안 자고 혼자 먼저  부산으로 떠났다.

밤에 자려고 누워있으니 대숲 바람이 불어서 시원했다. 더운 게 아니라 새벽에는 추울 것 같았다.
건너편 산에서 소쩍새 우는 소리도 들리고 가까이에서는 쏙쏙쏙 하고 우는 이름 모를 새 소리도 들렸다.
이 집을 사고 나서 처음 자보는 '첫날밤'이라서 그런지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나와 아내, 딸 봉현이, 그리고 9개월 된 개 하늬.
한 방에 나란히 누워 있으니 오붓한 느낌이 든다. 여긴 산마루처럼 방안에서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도 들리지 않고 기차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아직 그전 주인이 짐을 가져 가지 않아 거실에는 이삿짐이 올망졸망 놓여 있어서 어수선하지만 그래도 마음만은 아늑하다.

 방 안 창문으로 바라보이는 대숲, 큰 감나무.
감나무에 감이 조랑조랑 열려 있는 것을 보니 따 먹지 않아도 마음이 푸근해진다.


무엇이든 처음에는 가슴이 두근거리고 떨리는 법이다.
첫 시험, 첫 입학, 첫 출근, 첫 담임, 첫 키스, 첫날 밤......
  이 집을 사기까지 참 많은 일들이 있었고 시행착오도 많이 했다.
  차도 없던 시절에 김해 무척산 아래에 있는 여차리에 175평짜리 시골집을 315만 원에 샀다가 도저히 관리가 안 되어 도로 팔아 버렸고, 밀양 청도면 요고리에 밭 천 평을 300만 원 주고 샀다가 그 역시 오고 가기가 불편한데다 너무 오지라서 팔아버린 적이 있었다.
그 다음엔 생림면의 산마루였고.....

그래도 지금 운정리 집안에 있는 큰 감나무를 보고 있으니 그 동안의 내 노력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해 여차리와 밀양 요고리에 차도 없이 아들과 같이  버스를 타고 가서 감나무를 얼마나 많이 심었는지 모른다. 내가 그때 심은 감나무들이  벌써 십 년이 넘었으니 얼마나 많이 자랐을까! 그때 심은 감나무들이 지금 여기에 이렇게  서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니 내가 심은 나무들은 하나도 헛되지 않은 셈이다. 아내는 따 먹지도 못하고  심기만 심었다고 놀리지만 그때의 땀방울들이 하나, 둘  모여서 운정리 계곡으로  흘러왔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내가 시골을 좋아하게 된 까닭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어릴 때의 추억 때문인 듯 하다.
나는 7살까지는 시골에서 자랐다. 그러다가 부산으로 이사를 왔는데 어릴 때 본 호수가의 잠자리, 거미줄 잠자리채, 여러 가지 곤충, 벼가 서있는 들판, 냇물에서 헤엄치던 일들...
그런 아련한 추억들이 늘 내 가슴 속에서 살아 숨쉬며 나도 모르게 자꾸만 시골로  향하게 만들었다. 그만큼 어린 시절의 경험과 추억은 소중한 것이다.
돈이 없어서 시골집을 척 살 수는 없었지만 남이 장만한 시골집을 부러워하며 나도 언젠가는 버젓이 가져보리라 마음 속으로 몇 번이나 되뇌이곤 했다.
이제 50줄이 넘어서야 비로소 그 소원을 이루었고 이렇게 시골집 안방에 누워 있으니  참 감회가 새롭다.

 다음날 나는 대숲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매미 소리에 일찍 잠이 깨었다.
나는 일어나자 마당으로 나가 맑은 공기를 쐬고 아침 이슬이 맺힌 대나무를 바라보았다.
풋풋한 향기를 품고 있는 나무들과 여러 가지 식물들.
나는 호박과 고구마, 고추들을 돌아보고 어제 석대 나무 시장에서 사온 살구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원래 여름에는 나무를 옮겨 심으면 살기 어렵지만 오늘과 내일은 비가 온다는 일기 예보를 들어서 나무를 사왔다. 살구 나무는 고향의 봄에도 나오고 교과서에 '분이네집  살구나무'라는 동시로도 소개되어서 꼭 심고 싶었다.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나이 들어서 정년 퇴직을 한 뒤에 시골을 찾고 싶지는 않았다.
한 살이라도 더 젊을 때 시골에 들어와서 내 손으로 나무도 심고 내가 심은 나무에서 과일 열매도 따 먹고 싶었다.
오늘 사온 살구나무는 3년생이라 잘만 하면 내년부터 열매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1년생 묘목은 열매가 열리려면 몇 년의 세월이 필요하지만, 당장 3년생을 심으면 내가  2005년에 살고 있으면서 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어서 좋다. 말하자면 3년의 시간을 번 셈이다.

  < 집에서 바라보이는 저수지>

 



 나무를 심어 놓고 밭 주변을 돌아보니 대추나무에 대추도 열리고 있고, 산마루에서 갖다 심은 석류나무도 살은 것 같았다. 그리고 현선생님이 산마루에 갖다준 삼백초도 대여섯 뿌리를 파왔는데 삼백초도 싱싱하게 살아 있어서 반가웠다.

 

   < 삼백초 >




 대문 옆에 심어 놓은 감태나무도 아직 새잎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죽은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나서 나 혼자 아침에 석대 꽃집에 가서 25000원에 사온 수련 두 그루를 들고 집 아래에 있는 저수지로 갔다.
수련은 통째로 저수지에 던져 놓으면 산다고 해서 흙이 있는 채로 풍덩 던졌다.
앞으로 저 수련이 잘 번져서 저수지에 수련 꽃이 피어나면 참 보기 좋겠지.
아내는 미국에 갔다 와서 해도 늦지 않을 텐데 극성이라고 하지만, 내가 없는 동안에  한 여름 뙤약볕을 받으면 잘 자라면 얼마나 좋은가! 하루 햇빛이 아쉬운 판에 2주일이 적은 시간인가?

  < 범초 산장 바로 옆에 있는 박씨네 문중 제실 >



  

 돌아오는 길에는 밀양 법원 앞에 있는 법무사에 들러 운정리 집의 등기 필증을 찾아 왔다. 정식 내 이름으로 이전된 집문서를 보니 이제 정말 시골집을 장만했다는 기분이 들었다.

 

 위의 나무는 집  마당 안에 있는 나무인데 이름을 아직은 모르겠다.  


 < 시골에 따라간 하늬 > 

출처 : 글나라
글쓴이 : 凡 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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