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창작

[스크랩] 옛이야기와 동화(1) : 우리 동화의 옛이야기 계승 양상 (이지호) : 자료-오픈키즈 10월호

凡草 2005. 10. 2. 09:31
옛이야기와 동화(1) : 우리 동화의 옛이야기 계승 양상 이지호


어린이는 옛이야기를 좋아한다. 그것도 아주 많이 좋아한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어린이가 좋아하는 옛이야기가 어른이 말로 들려주는 옛이야기라면 그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어린이는 이야기를 듣는 것, 그것도 어른한테 듣는 것을 유별나게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린이가 좋아하는 옛이야기는 그런 것에 그치지 않는다. 자신이 글로 읽어야 하는 옛이야기도 동화만큼, 아니 동화보다 더 좋아하니 그것이 놀랍다는 것이다.

옛이야기는 말로 들려주는 이야기이고 귀로 듣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말에 의존하는 이야기는 기억하기에 유리한 구조로 짜 놓지 않으면 안 된다. 옛이야기는 사건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다. 사건은 그것을 구성하는 개별 행위 사이의 계기성이나 인과성 때문에 그 구조를 쉽게 파악할 수 있고 그래서 쉽게 기억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건이라는 것은 누군가가 일으키거나 누군가에게 일어나는 것이고, 또 그 누군가가 머물고 있는 특정의 시공간에서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모든 조건이 동일한 상황이라 할지라도 인물에 따라서 그리고 배경에 따라서 천차만별의 사건이 구성된다. 그러므로 사건 중심으로 이야기를 구성한다고 하더라도 사건의 주체인 인물과 사건의 무대인 배경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옛이야기는 이를 완전히 무시한다. ‘옛날 옛적에 어떤 사람이……’만으로 인물과 배경에 대한 소개를 끝내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 또한 기억의 부담을 줄이려는 의도와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기억의 편의를 위해서 꼭 필요한 정보를 일부러 누락시킬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옛이야기는 애시당초 인물과 배경에 관한 정보를 그다지 필요로 하지 않는 사건, 즉 인물과 배경의 개별적인 속성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 사건을 이야깃거리로 삼았다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사건은 누구든지 언제든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인간 행위의 한 유형을 보여 주는 사건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결국 옛이야기는 사건을 통해서 인물을 형상화하는 셈이다. 그래도 인물의 유형적 성격을 구현하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다. 인물의 사건 속 행위가 그 성격을 짐작하게 하는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옛이야기의 주인공을 흔히 전형적 인물이라 일컫는다. 전형적 인물이란 인간의 한 유형을 대표할 만한 인물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인물은 개인적 속성을 드러낼 수가 없다. 그래서 옛이야기의 주인공에서는 그 자신의 성격으로 인한 내적 갈등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덧붙여 둘 것은 인물에 대한 상투적 묘사만큼은 옛이야기에서도 아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당연한 것이다. 전형적 인물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방법으로는 상투적 표현이 최소 노력으로 최대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옛이야기가 배경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데 신경을 쓰지 않는 까닭도 이미 어느 정도는 설명이 된 것 같다. 전형적 인물이 이끌려 가는 유형적 사건에서는 배경은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이 그 설명의 의도였다. 다만, 이 자리에서는 ‘옛날 옛적에’의 다양한 의미를 통해서 그 의도를 좀더 부각시키고자 한다. ‘옛날 옛적에’는 말 그대로 현실 세계의 아주 먼 과거 시점을 뜻하기도 하고 이야기가 구연되는 그 당시의 현재 시점을 뜻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이것은 현실 세계가 아닌 환상 세계를 뜻하기도 한다. 그런데 ‘옛날 옛적에’가 그 어느 쪽을 뜻하든지 간에, 그 속에서 펼쳐지는 사건은 현실 세계에서 일어날 법한 유형적 사건이거나 그것의 은유라는 사실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옛이야기는 배경에 적합한 사건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을 구성하는 데 편리한 배경을 선택한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옛이야기의 구조적 특징을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그런데 이것은 어린이가 영위하는 삶의 구조적 특징과 매우 흡사하다. 우선 어린이는 사건을 통해서 인물과 배경을 이해하는 경향이 있음을 지적할 수 있겠다. 아기가 태어났을 때, 맨 처음 마주치는 것은 엄마라는 인물도 아니고 병원이라는 배경도 아니다. 사건이다. 따뜻한 양수에서 빠져나와 차가운 공기에 온몸을 드러내는가 싶더니, 어느 새 누군가의 포근한 품에 안기는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이때부터 어린이는 끊임없이 사건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사건에 개입하는 인물도 알아차리게 되고 사건이 벌어지는 배경도 눈여겨보게 된다.

그러나 어린이가 경험하는 사건이란 거기서 거기다. 유형화할 수 있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어린이가 경험하는 사건은 먹고 입고 자는 것과 관련된 사건, 놀고 공부하고 일하는 것과 관련된 사건 그리고 어른 또는 또래 어린이와 관련된 사건 등이다. 그런데 이 각각의 사건은 한정된 몇 가지 유형으로 전개된다. 그것은 언제 어디서나 똑같다. 어린이는 한편으로는 어린이로 살아가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어른으로 자라나야 한다는 것과, 그 일이 어른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는 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불변의 진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까닭에 어른은 적어도 어린이 앞에서는 전형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다. 그것은 어린이를 전형적인 어린이로 키우기 위한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어린이는 자신이 경험한 사건에 관여하지 않은 인물에 대해서는 어떠한 평가도 하지 못한다. 사실, 어린이만 그런 것이 아니다. 그래서 어린이든 어른이든 인물에 대한 평가는 그 인물의 행위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하게 된다. 그런데 평가의 결과가 사뭇 다르다. 어른은 상투적 표현과 같은 평가는 결코 하지 않지만 어린이는 그런 평가를 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래서 주변 인물에 대한 어린이의 평가는 거의 대부분 ‘좋은 사람’ 아니면 ‘나쁜 놈’으로 갈린다. 어린이 앞에 선 어른은 어린이에게 어린이로서의 전형을 가르치기 위해서 자신이 어른으로서의 전형으로 보이게 하려고 무척 애를 쓴다. 어른의 이러한 태도가 어린이의 이분법적 인물 평가를 촉발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것이 다는 아니다. 어린이의 인지 능력이 그러한 평가밖에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린이의 삶은 대부분이 어른과 부대끼는 삶이다. 그런데 어린이와 어른의 관계는 때와 장소에 상관없이 언제나 똑같다. 사정이 이러하니, 어린이가 배경의 의미를 특별하게 생각하게 되는 경우는 드물다. 예외적인 경우가 있긴 하다. 가정 환경이 온전치 못한 탓에 어린이이면서 어른 노릇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소년소녀 가장이 이에 해당한다. 소년소녀 가장은 가정 환경이라는 배경과 끊임없이 정면으로 맞서 싸워야 하니, 그 의미를 어른 못지않게 심각하게 곱씹게 된다. 어린이이기를 포기하여야 하는 어린이, 그래서 소년소녀 가장은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어린이인 것이다.

어린이가 영위하는 삶의 구조가 옛이야기의 구조와 친연성이 두드러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어린이가 옛이야기를 그토록 좋아하는 까닭을 설명하기에는 충분치 못하다. 열쇠는 옛이야기의 사건 그 자체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옛이야기는 그것의 전승에 관여한 수많은 사람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남한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조사한 옛이야기를 구술본 형태로 묶어 낸 『한국구비문학대계』를 보면, 옛어른이 얼마나 다양한 사건을 얼마나 다양한 방법으로 그 얼개를 짜고 있는지 한눈에 알아 볼 수 있다. 『한국구비문학대계』를 사건 구성에 관한 실험 보고서라 일컫는다고 해도 조금도 어색할 것이 없다. 어린이에게 말로 들려주거나 글로 읽게 하는 옛이야기는 그러한 옛이야기 가운데 정수라 할 만한 것만 가려서 뽑은 것이니, 어린이가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동화가 옛이야기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옛이야기에 기대어 동화를 쓰는 첫 번째 방식은 옛이야기 그 자체를 곧장 동화로 다듬어쓰는 것이다. 옛이야기는 옛어른이 말로 즐겼던 이야기이라서, 요즘 어린이가 글로 즐기는 동화와 거리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옛이야기 가운데는 어린이가 즐길 수 있는 이야기도 적지 않다. 이러한 옛이야기는 글로 옮겨서 가다듬기만 하면 동화의 구실을 톡톡히 해 낸다.

‘다듬어쓰기’를 할 때 이야기의 줄거리 또는 이야기의 구조를 훼손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의미의 빈칸을 채워 넣는 것은 허용된다. 옛이야기를 글로 옮겨 쓰는 방법을 다섯 가지로 정리한 바 있는 서정오 씨의 용어와 비교하면, 다듬어쓰기는 ‘다시 쓰기’(큰 줄거리는 손대지 않고 틀린 말을 바로잡는다든지 사투리를 표준말로 고치는 것)와 ‘고쳐 쓰기’(이야기 줄거리 중에서 몇 부분을 빼거나 고치거나 더 집어넣어서 본래 모습과 다르게 쓰는 것)의 중간 지점에 놓을 수 있는 것이다.

다듬어쓰기를 하려면 먼저 저본으로 삼을 옛이야기를 선택하여야 하는데, 이는 유형을 선택하고 각 편을 선택하는 두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를테면, ‘여우 누이’ 유형이 아닌 ‘나무꾼과 선녀’ 유형을 골라잡고, 그 유형에 귀속될 수 있는 수많은 옛이야기 가운데 이른바 ‘나무꾼 하강형’ 이야기가 아닌 ‘선녀 승천형’ 이야기를 가려낸다는 것이다. 이 선택의 결과는 작가의 동화관에 따라서 크게 달라진다. 그래서 다듬어쓰기는 작가 자신의 옛이야기 정본을 확정하는 작업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다듬어쓰기에서 저본 확정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말을 글로 번역하는 것이다. 즉, 말로 된 옛이야기를 글로 된 동화로 전환하는 것이다. 말과 글은 각각의 물리적 특성과 의사 소통적 특성이 너무 다르기 때문에 일대일의 맞전환이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다듬어쓰기를 번역의 한 양상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다듬어쓰는 것을 입말체로 쓰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물론 입말체로 다듬어쓰는 것, 그 자체가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입말체 또한 작가가 글을 쓸 때 선택할 수 있는 다양한 문체 가운데 포함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입말체로 쓰기만 하면 말이 글로 저절로 번역된다고 믿는다면, 이는 중대한 문제가 된다. 어떤 사람은 입말체로 다듬어쓴 것은 들려주기에 적합한 것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이것은 다듬어쓰기를 구연 대본 쓰기로 오해한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해 보면 그렇게 안 된다. 다듬어쓴 것은 읽어 줄 수는 있어도 들려줄 수는 없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옛이야기는 물론 들려주는 것이 좋다. 옛이야기는 원래 말로 짜여진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옛이야기를 동화로 다듬어쓰는 것은 글로 읽게 하기 위한 것임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말은 말다워야 듣기가 좋고 글은 글다워야 읽기가 좋다. 옛이야기의 구술 채록본을 읽으면 지겹고 짜증스럽다. 말을 글로 읽으니 그런 것이다. 마찬가지로, 동화로 거듭난 옛이야기를 말의 분위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입말체의 글로만 읽어야 한다면 그 또한 그다지 유쾌하지는 않을 것 같다.



다듬어쓰기는 옛이야기를 조금도 훼손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동화로 거듭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는 반대로 옛이야기를 훼손하면서 동화를 쓰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예컨대, 옛이야기의 이야기 구조를 뒤집어서 동화의 이야기 구조를 창안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그것을 ‘뒤집어쓰기’로 일컫기로 한다.

뒤집어쓰기는 이야기 구조의 관여 요소 가운데 무엇을 어떻게 뒤집는가에 따라서 다시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가 이야기의 초점 뒤집기이다. 옛이야기 「여우 누이」는 누이로 태어난 여우에게 두 형님과 부모를 잃은 막내 오빠에게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를 펼쳐 나간다. 그런데 『끝지』(이형진 글·그림, 느림보, 2003)에서는 여우 누이의 관점이 잘 드러날 수 있도록 이야기의 초점을 여우 누이에게 맞추었다. 두 번째는 이야기 구조의 관여 요소 가운데 일부를 아예 그것과 대립적인 것으로 뒤집어 버리는 것이다. 『상어를 사랑한 인어 공주』(임정진, 푸른책들, 2004)에 실린 같은 제목의 동화는 안데르센의 인어 공주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인어 공주를 탄생시켰다. 그것은 머리는 물고기 머리이고 다리는 사람 다리인 인어 공주였다. 이러한 인어 공주이기에 상어 왕자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세번째는, 이야기 구조의 관여 요소는 그대로 두되, 관여 요소 사이의 관계를 뒤집는 것이다. 『백설공주를 사랑한 난장이』(서광현·박승걸 공저, 여름솔, 2002)에서는 백설공주는 난장이 가운데 한 사람의 짝사랑 상대가 된다.

그런데 뒤집어쓰기에서는 뒤집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뒤집어야 하고 또 그 가치가 제대로 드러나도록 옹골지게 뒤집어야 한다. 옛이야기 「여우 누이」에서는 여우가 사람의 집에 딸로 태어나서 그 집안 식구를 모두 죽이려고 하는 까닭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아들을 셋 또는 그 이상을 두고 있으면서도 또 딸을 원하는 자식 욕심을 경계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설득력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끝지』는 이야기의 초점을 여우 누이에게 맞추어 「여우 누이」의 불명확성을 제거했다. 즉, 여우 누이는 자신의 여우 부모를 죽인 원수에게 앙갚음을 하기 위해서 그 집의 딸로 태어났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새로운 갈등을 야기시킨다. 여우 누이의 입장에서 보면 (여우) 부모의 원수도 (사람) 부모이기 때문이다. 이에서 알 수 있듯이, 『끝지』의 작가는 「여우 누이」를 뒤집어서 다시 씀으로써, 한편으로는 「여우 누이」를 보완할 수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여우 누이」와는 차원이 다른 새로운 문제를 제기할 수 있었다.

이에 반해서, 「상어를 사랑한 인어 공주」는 뒤집을 수 없는 것을 뒤집었고 『백설공주를 사랑한 난장이』는 뒤집으나마나한 것을 뒤집었다. 「상어를 사랑한 인어 공주」의 인어 공주는 물 속을 걸어서 다닌다. 사람의 발을 갖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것은 물 속에서 살아가는 동물은 물 속에서 이동하기에 적합한 하체를 가지게 되는 자연의 순리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다. 왜 이런 결과가 생겼을까. 간명하게 답할 수 있다. 뒤집기 그 자체를 위한 뒤집기가 이와 같은 기형적인 인어 공주를 탄생시켰다고. 『백설공주를 사랑한 난장이』는 그림 형제의 「백설공주」의 주제 의식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그것과 관련한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굳이 「백설공주」를 뒤집을 까닭이 없다. 그래서 뒤집으나마나한 것을 뒤집었다고 꼬집은 것이다. 「상어를 사랑한 인어 공주」에 대해서도 똑같은 비판을 할 수 있다.



다듬어쓰기는 옛이야기의 줄거리·주제 의식·이야기 구조에 기대어 동화를 쓰는 것이고, 뒤집어쓰기는 옛이야기의 이야기 구조에 기대어 동화를 쓰는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옛이야기의 미학과 그것에 따른 이야기 구조화 방법밖에 없다. 그런데 이러한 것은 옛이야기 속에 녹아 있는 것이고 또 동화 속에 녹여 넣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동화의 옛이야기 계승 방식으로는 마지막이 될 ‘녹여쓰기’와 마주치게 된다.

다듬어쓰기와 뒤집어쓰기가 옛이야기의 계승 방식이라는 것은 한눈에 알아 볼 수 있다. 그 둘은 옛이야기의 전부 또는 일부를 동화 속에 온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녹여쓰기는 말 그대로 옛이야기를 녹여서 동화 속에 스며들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방식으로 씌어진 동화에서는 옛이야기의 흔적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나는 녹여쓰기의 전범은 『마당을 나온 암탉』(황선미, 사계절, 2000)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작가 자신이 펄쩍 뛸지도 모르겠다. 옛이야기의 ‘옛’자도 떠올려 본 적이 없다고 말이다. 그래도 상관이 없다. 작가의 무의식 속에 옛이야기의 미학과 이야기 구조화 방법이 각인되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마당을 나온 암탉』과는 달리, 『밥데기 죽데기』(권정생, 바오로딸, 1999)와 『해를 삼킨 아이들』(김기정, 창비, 2004), 그리고 『물이, 길 떠나는 아이』(임정자, 문학동네어린이, 2005)는 옛이야기에 기대어 쓴 동화임을 아주 표나게 드러낸다. 물론 예시한 동화는 다시쓰기나 뒤집어쓰기를 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녹여쓰기를 한 것이라 말하기도 어렵다. 눈에 띄는 것은 옛이야기의 모티프, 기법, 형식뿐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동화로서도 격이 떨어진다. 사건 자체가 너무나 허술하게 짜여 있기 때문이다. 이 자리에서 입에 올린 동화는 녹여쓰기에 관한 전략을 탐색하는 자리에서 재론될 것이므로 이에 대한 상론은 그때까지 미루어 두기로 한다.



최근 들어 동화에서 옛이야기를 계승하려는 시도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옛이야기의 모티프를 차용하거나 기법이나 형식을 모방하는 데 그치는 것 같아 아쉽기 짝이 없다. 이러한 것도 어린이의 관심을 끄는 데는 한 몫 할 수 있다. 그러나 동화도 이야기 그 자체에 승부를 걸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옛이야기에서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공들여 배워야 할 것은 아무래도 사건 중심의 이야기 구조화 방법일 것 같다. 물론 옛이야기의 이야기 구조화 방법을 동화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 옛이야기는 시공간에 구애되지 않는 유형적 사건을 통해서 전형적 인물을 형상화했고, 또 어린이는 그러한 옛이야기에 호감을 드러냈지만, 동화가 옛이야기를 그대로 답습하고 어린이의 취향을 추종할 수만은 없다. 다시 말해서, 동화는 문제적 사건을 통해서 개성적 인물을 형상화하고 그런 인물을 통해서 어린이에게 주체적인 인간상을 심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어린이는 어린이의 전형이 어떠한 존재인지 알아 둘 필요가 있다. 어린이에게는 어린이 자신을 비추어 볼 거울이 필요한 것이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는 어린이는 이러저러하여야 마땅하다는 이야기가 많이 오간다. 그러나 그것은 어른의 입장에서 어린이의 전형을 일방적으로 규정한 것일 뿐이다. 물론 그것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은 위험하다. 불신의 단초는 옛이야기가 제공했다. 옛이야기 속의 어린이는 아주 무기력한 존재 또는 어른보다 더 어른스러운 존재로 형상화되는데, 오늘날 어느 누구도 이러한 어린이에서 어린이의 전형을 찾으려고 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아직 어린이의 정체조차 잘 알지 못한다. 어린이가 발견된 지 이제 겨우 백 년이 지났다고 한다. 백 년이라는 시간은 어린이의 정체를 제대로 탐색하기에는 턱없이 짧은 시간이다. 옛이야기는 어른의 전형을 탐색하는 데 수천 년이 걸렸지 않은가. 동화가 갈 길은 아직도 먼 것이다. 현시점에서 동화가 떠맡아야 할 가장 시급한 과제는 어린이의 정체를 밝히는 일이다. 이 세상의 모든 어린이를 추적하는 것은 어차피 가능하지 않다. 그렇다면 특히 개성이 또렷한 어린이를 추적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들이 엮어 내는 사건을 이야기로 다루어야 한다. 이때, 옛이야기의 사건 구성 방법을 적절하게 활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옛이야기는 그 방면에 있어서는 최고 수준의 노하우를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린이의 정체가 어느 정도 규명되면 어린이의 전형은 저절로 마련될 것이다. 어쩌면, 오늘날 우리가 어린이의 개성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 먼 뒷날 어린이의 전형적인 속성으로 규정될지도 모를 일이다.

동화가 옛이야기를 되돌아보는 것은 옛이야기의 미학을 구현하는 이야기 구조화 방법을 동화의 미학을 구현하는 이야기 구조화 방법으로 전환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함이다. 그것은 동화의 지평을 확장하기 위한 것이지, 옛이야기를 해체하거나 옛이야기의 한 요소를 빌리거나 옛이야기의 아류를 생산하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니다. 이 시점에서 옛이야기 긍정론과 부정론을 다시 검토할 필요를 느낀다. 그것은 동화의 옛이야기 계승 방향을 시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관한 논의는 다음으로 미룰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글쓴이
이지호 /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서 국어교육을 공부하고 교육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현재 진주교육대학교에서 어린이 문학 교육과 글쓰기 교육을 가르치면서 동시에 배우고 있습니다. 저서로 『글쓰기와 글쓰기 교육』(서울대학교 출판부, 2001), 『동화의 힘, 비평의 힘』(주니어김영사, 2004)등 이 있습니다.
이 글에 나온 책들
마당을 나온 암탉 / 황선미 지음, 김환영 그림 / 사계절
밥데기 죽데기 / 권정생 지음, 권문희 그림 / 성바오로딸
끝지 / 이형진 글·그림 / 느림보
해를 삼킨 아이들 / 김기정 글, 김환영 그림 / 창비
상어를 사랑한 인어 공주 / 임정진 패러디 동화집, 유기훈 그림 / 푸른책들
물이, 길 떠나는 아이 / 임정자 글, 지혜라 그림 / 문학동네어린이
출처 : 글나라
글쓴이 : 남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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