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창작

[이명희] 그냥 꿈이라야 해!

凡草 2005. 10. 17. 21:31
그냥 꿈이라야 해 이 명 희 “안 돼. 그건 그냥 꿈이었어.” “휴, 내가 괜히 알려줬나 봐.” “물이 얼마나 소중한 건지 너 아직 몰라서 그래. 선이야.” “야! 알았어. 알았으니까 아이스크림이나 먹어라 응?” 앞서가던 선이가 마침내 짜증을 냅니다. 정말 이상한 일입니다. 별 것도 아닌 뉴스에 현지는 마치 정신이 나간 아이처럼 학원에 다 가도록 중얼거립니다. 선이가 사 준 아이스크림이 손안에서 녹아 뚝뚝 흘러내리는 것도 모르고서 말입니다. 바람 한 점 없이 후덥지근한 날이었습니다. ‘비라도 내리면 시원할 텐데.......’ 현지는 야속하다는 듯, 한참동안 하늘을 바라보다 창문을 닫고 돌아섰습니다. 베란다 한 쪽에 늘어선 화분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언제 물을 준건지, 하나같이 바싹 말라 물기라곤 느껴지지 않는 화분들입니다. 앵초, 금낭화, 양지꽃들처럼 얕은 화분에 심어진 꽃들은 이미 말라죽은 지 오래여서 만지기만 해도 바스락 소리가 날 것 같습니다. 초록잎이 눈부시던 벤자민도 노오란 낙엽을 하나씩 떨궈내더니 하루가 다르게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현지의 작은 어깨 역시 시들어 가는 꽃나무들처럼 축 처져있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엄마랑 나갈 걸.’ 수도꼭지를 노려보는 현지의 마음이 답답하기만 합니다. 엄마는 현지에게 신신당부를 했습니다. “현지야, 잠이 들면 안 된다. 어디 나가지도 말고...... 물통마다 가득가득 받아 놔야 한다. 알았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수도꼭지를 이리저리 틀어보지만 물이 나올 기미는 도통 보이지 않습니다. 오늘은 수요일. 일주일에 한 번 물이 나오는 날입니다. 현지네 뿐 아닙니다. 집집마다 아침이면 주방, 화장실, 심지어는 거실까지 온 집안에 크고 작은 물통들을 준비해놓고 물이 나오기만 목을 늘여 기다리는 날입니다. 하지만 이 시간이 되도록 나오지 않는 걸 보면 아무래도 포기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큰 물통 두 개를 들고 미리 약수터로 간 엄마는 이렇게 될 줄 알았나 봅니다. 물 없이 일주일을 산다는 게 어떤 건지 잘 아는 현지는 온 몸에서 힘이 쭉 빠져버립니다. 언젠가 친척집 일로 급하게 집을 비운 날, 물을 받지 못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현지네는 매 끼니때마다 식당에서 밥을 사먹어야 했습니다. 목이 마른 건 식당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느 식당에서도 공짜로 물을 주는 곳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물은 다른 음식들과 마찬가지로 메뉴판 제일 위에 턱하니 적혀 있어, 주문하지 않으면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물 값이 비싸니 음식값 또한 터무니없이 비싸져서 예전처럼 함부로 이것저것 시켜먹을 수도 없었습니다. 매 끼니 때마다 밥은 그렇게 식당에서 해결했지만 목이 타들어 가도 물 한 방울 없는 집안에 화장실에서 새어나오는 냄새는 또 얼마나 지독한지, 하루종일 창문을 열어놔도, 코를 틀어막아도 머리가 지끈지끈 아플 지경이었습니다. 정말이지 그 일주일동안 물이 없는 세상이 어떤가를 뼈저리게 느끼면서 악몽과도 같은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던 것입니다. 아무리 친한 이웃이라 해도 물은 빌려주지 않는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물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르는 이유도 다 물 때문입니다. 정해진 날짜에 이렇게 물이 나오지 않는 걸 보면 물 사정이 훨씬 나빠졌다는 이야기입니다. 현지는 마침내 물통 두 개를 챙겨들고 현관문을 나섭니다. 너도나도 약수터로 향하는 사람들로 좁은 숲길은 발 디딜 틈이 없었습니다. “물 사정이 갈수록 나빠지니 이를 어떡해요?” “앞으로는 열흘에 한 번씩 물을 보내줄 거래요.” “이러다가 아예 물이 안나오면 어떻게 되는 거지?” “외국에서 사와야겠지요. 보나마나 엄청나게 비싸겠지만.” “돈 없는 사람들은 물도 못 먹겠네요. 지금도 금값인데.......” “그러게 물 전쟁이 일어날거란 소문도 들리잖아요.” “꿈만 같아요. 물을 물 쓰듯 펑펑 쓰던 날들이...... 하긴 다들 그렇게 아까운 줄도 모르고 써버렸으니 이렇게 된 거지만 우리는 그렇다 치고 앞으로 우리 아이들은 어떻게 살아갈까 그 생각만 하면 가슴이 답답해져요.” 지나가는 어른들의 한숨 섞인 얘기들이 현지의 발걸음을 더욱 무겁게 합니다. 선생님에게 비슷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어깨를 툭 칩니다. “현지야, 너도 물 뜨러 가니?” 106동에 사는 선이였습니다. “응, 깔끔이구나. 집안에 물이라곤 없으니 어쩌겠니?” “맞아. 우리 집도 그래. 오늘 아침부터 밥을 못 먹었어. 집안이 엉망이야.” “그나저나 목이 말라죽겠네. 아니 저건 또 뭐야?” 약수터 앞에 팻말이 보입니다. -죄송합니다. 더 이상 물이 나오지 않아 오늘부터 이 약수터를 폐쇄합니다.- 언제나 맑은 물이 퐁퐁퐁 샘솟던 약수터엔 빈 바가지만 덩그렇게 놓여있습니다. 선이와 현지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바닥에 풀썩 주저앉고 맙니다. 웅성웅성 모여 떠드는 사람들, 선이와 현지처럼 주저앉아 있는 사람들, 실망한 표정으로 터덜터덜 내려가는 사람들로 약수터 앞은 장터처럼 떠들썩합니다. 힘없이 주저앉아 있던 선이가 벌떡 일어서더니 약수터 뒤쪽으로 난 숲길을 가리킵니다. “우리 저기 가는 어른들을 따라가 보자. 아마 물이 있는 곳을 알고 있을지도 몰라.” 어쩐지 늦어진다 싶더니 엄마 역시 다른 곳으로 물을 뜨러 갔나봅니다. 현지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선이가 앞장서서 어른들 뒤를 바짝 뒤쫓습니다. 그런 선이 뒤를 현지가 뒤쫓습니다. “깔끔아! 같이 가.” “사람들이 웃겠다. 그냥 선이라고 불러.” 머리며 옷차림이 늘 깔끔하고 단정해서 깔끔이란 별명이 따라다녔던 선이입니다. 그러고 보니 언제 감았는지 부스스한 머리칼, 꾀죄죄한 블라우스, 까맣다 못해 반질반질한 운동화, 뒤에서 봐도 깔끔이 선이의 차림새는 깔끔이가 아니라 영락없는 거지꼴입니다. 물론 꾀죄죄하기는 현지 자신도 마찬가지입니다. ‘1년 전만 해도 이렇지는 않았었는데......휴!’ 그 때만 해도 수돗물이 격일제로 나오던 때입니다. 그 때만해도 이렇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아이들도 어른들도, 여전히 물이 귀하다는 생각을 못한 채, 아낌없이 펑펑 썼던 것입니다. 그러던 것이 일주일에 두 번으로 바뀌더니 이젠 아예 일주일에 한 번으로 바뀌자 물을 보는 사람들의 생각이 확 달라졌습니다. 이제는 단 한 방울도 그냥 버리는 사람이 없습니다. 아니 버릴 물이 없어진 것입니다. 벌써 어둑어둑 해가 집니다. 앞서가던 어른들을 놓쳐버린 선이랑 현지는 물줄기를 찾아 헤매다가 낯선 골짜기 깊은 곳으로 들어와 버렸습니다. 이젠 더 이상 걸을 힘도 없어 비틀거리다 땅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았습니다. 둘이서 숨을 몰아쉬며 마주 쳐다봅니다. 입술이 타서 허옇게 갈라져 있습니다. “이제 어떡하지?” “내려가자.” “일어설 힘도 없어.” “나도 그래.” “목이 말라. 물을 마시고 싶어.” “나도.” 하늘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습니다. 무서운 생각도 사라졌습니다. 이러다가 죽을 것만 같습니다. 선이도 현지도 땅바닥에 쓰러지듯이 누웠습니다. 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을 바라보다가 두 사람은 힘없이 눈을 감았습니다. 그 때였습니다. 어디선가 희미하게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졸졸졸...... 분명히 물 흐르는 소리입니다. 그것도 가까운 곳에서 들리는 소리. “우와, 물소리다!” “물! 물소리! 살았다! ” 일어나서 달려가고 싶은데 몸이 꼼짝도 않습니다. 선이도 입술만 달싹거릴 뿐 꼼짝 않고 누워있습니다. “얘, 일어나. 현지야. 왜 여기 누워있어?” 아! 현지엄마의 놀란 목소리입니다. 쓰러진 두 사람을 용케도 찾아냈나 봅니다. “물, 물 엄마도 물소리 들리지?” 현지는 누운 채 팔만 허우적거렸습니다. “현지야. 아니, 얘는 책을 읽다 말고 웬 잠꼬대야? 비가 오는데 베란다 창문도 열어두고,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어디서 물소리가 난다했더니 얘가 세면장에 물도 안 잠그고.......” 외출에서 돌아온 엄마가 현지를 다시 한번 흔들어 깨웁니다. “어? 엄마!” 그제야 벌떡 일어나 엄마를 멍하니 쳐다보던 현지는 갑자기 물소리가 나는 쪽으로 쏜살같이 달려갑니다. 수도꼭지에서 쉴새없이 물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황급히 수도꼭지를 잠그다 말고 현지는 다시 한번 수도꼭지를 틀어봅니다. 기다렸다는 듯 물이 콸콸 쏟아집니다. 현지는 그제야 생각이 납니다. 아까 화장실을 갔다 온 현지가 수도꼭지를 잠그지 않았던 것입니다. 거실에 나와서야 수돗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하지만 읽고있던 동화책 때문에 조금 있다 잠가야지 하면서 미루다가 저도 모르게 깜빡 잠이 든 것입니다. ‘아휴, 이 아까운 물을 다 흘려보내다니......’ 손이 아프도록 꼭 돌려 잠근 뒤, 이번에는 주방으로 달려가서 수도꼭지를 열어봅니다. 시원스레 쏟아지는 물줄기가 보기만 해도 부자가 된 듯 흐뭇해집니다. 유리잔으로 한 잔 가득 받아 꿀꺽꿀꺽 마십니다. “우와, 정말 맛있어. 엄마! 물맛이 이렇게 맛있는 줄 미처 몰랐어요.” “물도 잘 안마시던 애가 웬 일이냐? 목이 어지간히 탄가 보네.” 빨래를 걷고 있던 엄마가 화알짝 웃습니다. “아이구, 현지야 이것 좀 봐라. 금낭화가 드디어 피었구나.” “어머, 꽃들이 싱싱하게 다시 살아났네.” “그럼 언제 죽기라도 했었니?” “응, 꿈에......” “꿈에? 얘가 무슨 꿈을 꿨기에 아직도 잠꼬댈 하는 거야?” 물기를 머금어 한층 싱싱하게 보이는 벤자민 잎새들 아래로 올망졸망한 분홍빛 앵초와 노오란 양지꽃이 귀엽습니다. 그 뒤로 볼록볼록한 주머니를 줄줄이 달고선 금낭화들도 화사하게 피어있었습니다. “그럼 그렇지. 정말 다행이야.” 꽃을 바라보는 현지의 얼굴에 꽃보다 밝은 웃음꽃이 활짝 피어납니다. “그나저나 오늘은 왜 친구가 안 오는 거냐?” 엄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현관 벨이 울립니다. 티 없이 하얀 얼굴에 뒤로 빗어 깔끔하게 묶은 머리, 여전히 깨끗한 블라우스와 치마가 잘 어울리는 106동 선이입니다. “현지야, 학원 가자.” 현지는 인사대신 낯선 표정으로 선이를 훑어봅니다. “왜 그래?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니?” “아니 예뻐서......널 계속 깔끔이라 불러도 되겠어.” “얘가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아니 그냥.” “근데 현지 너 소식 들었니?” “무슨 소식?” “빠르면 다음달부터 격일제로 물이 나온다는 소식 말이야.” “......뭐? 뭐라고? 너, 그게 무슨 말이야? 누가 그랬어?” “우리엄마가 그랬어. 방금 뉴스에 나왔대. 그 전부터 물 부족국가란 말은 들었지만...... 좀 불편할 것 같지 않니?” 현지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우뚝 멈춰 서서 중얼거립니다. “좀 불편할 것 같다고? 좀 불편할 것 같다고?” 꿈속에서 보았던 악몽 같은 일들이 다시 생생하게 떠올랐습니다. “뭘 그리 놀래? 지금 당장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닌데. 늦겠다. 빨리 와.” 여느 때와 달리 자꾸만 뒤로 쳐지는 현지에게 선이가 눈총을 줍니다. 깨끗한 블라우스와 치마가 잘 어울리는 깔끔이 선이의 뒷모습 위로 부스스한 머리에 꾀죄죄한 옷, 물통을 들고 힘없이 걷던 선이의 모습이 자꾸만 겹쳐지는 바람에 현지는 자꾸만 고개를 저었습니다. “안 돼. 꿈일 뿐이야. 그냥 꿈이라야 한다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