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한 다락방

강순아 선생님의 미술관 순례 <램브렌트전>

凡草 2005. 10. 28. 21:12

 

 

 램브렌트전

 

                                                      

 

                    ( 청소를 마치고 즐겨 음악을 듣던 시간-쾰른에서)

 

2002년 겨울 . 한달하고 일주일을 독일에 머물러 있었다.

뒤셀도르프, 에센, 본, 카셀에서 많은 전시를 볼 수 있었다.

 

호머로스가 쓴 일리야드 오딧세이아의 토로이.
그리고 페르시아 유물전.
영국의 풍경화의 대가 윌리암 터너전,
그림형제 박물관, 15-17세기 화가전.
빛의 마술사 렘브란트전. 그외 작은 전시들...

 

그 때만해도 우리 나라에서 열리는 유럽화단의 전시는 그리

많지 않았다.

 

                                    램브렌트

 

 

 

 
 
     렘브란트
      (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606.7.15 - 1669.10.4)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네덜란드 화가로 손꼽히는 렘브란트는
 네덜란드의 레이덴에서 제분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의
 희망에 따라 레이덴 대학에 들어갔으나, 수개월만에 화가를 지망하여
자퇴하였다. 그후 라이덴의 화가 J. 스와넨브르크에게 사사받았으며,
이어서 암스테르담에서 P. 라스트만의 문하에 들어갔다.
1624년 라이덴으로 돌아와 이듬해부터 독립하여 아틀리에를 열었다.
1632년까지 독학으로 친척, 이웃노인, 성서에서 소재를 얻어 꾸준히
 그림을 그렸다.

그의 노력이 열매를 맺어 1632년 암스테르담 의사조합으로부터 위촉받은 [툴르프 박사의 해부]의 호평을 계기로 암스테르담에 정착하였다. 1634년 명문가의 딸 사스키아 판 오이렌부르흐와 결혼하였으며 당시의 미술세계시장 이라고 할 수 있는 암스테르담에서 첫째가는 초상화가로서의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그의 회화가 성숙함에 따라 당시의 일반적 기호였던 평면적인 초상화 등에 만족할 수 없게 되어 외면적인 유사성보다는 오히려 내면적인 것, 인간성의 깊이를 그리고자 하는 바램이 절실해졌고, 종교나 신화적인 소재나 자화상류의 작품이 많아졌다

 

 

오늘날 그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작품의 대부분은

1640년대 이후에 만들어졌다.

그러나 생활은 날로 어려워졌으며, 결국 1656년에 파산선고를

받아 살고 있던 저택도, 그의 예술적 영감을 끝없이 자극해주던

 여러 가지 미술품도 모두 그의 손에서 떠나게 되었다.
1662년 헨드리케가 죽고, 1668년에는 유일한 아들인 티투스마저 죽자,

그도 이듬해 10월 유대인 구역의 초라한 집에서 임종을 지켜보는

사람도 없이 쓸쓸히 죽었다.

그가 죽을 때 남긴 것이라고는 옷 몇 벌과 그림 도구뿐이었다고 전해진다.

 

 

그의 작품에 높은 종교적 정감과 깊은 인간 심정의 움직임이

표현되어 있는 것은 그 특유의 명암법에서 기인한다.

그의 작품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빛의 효과를 최대한 활용하여

색채 및 명암의 대조를 강조함으로써 의도하는 회화적

효과를 얻었다는 점이다. 그를 일컬어 '혼의 화가', '명암의 화가'라고

 하는 것은. 작품의 대상에 대해서는 사실적이지만,

빛의 효과에 대해서는 최대의 이상주의자였기 때문이다.

즉, 색이나 모양이 모두 빛 자체이며,

명암을 통해 생명의 흐름을 표현했다. '빛의 미술가'라고도 불리우는

렘브란트의 화려한 붓놀림, 풍부한 색채, 하늘에서 쏟아지는

듯한 빛과 어두움, 강렬한 힘과 내면을 꿰뚫는 통찰력,

종교적 권능을 감지하게 하는 탁월한

빛의 처리 기법은 미술사의 영원한 신비로 남아 있다.

 


 
램브렌트전은  오래된 고성 빌헤름스 헤세에서 열리고 있었다.
전시장 가는 길.
 
 
 
빌헤름스 헤세 성
 
 
 
성의 뒷뜰 에서 상당한 거리를 두고 바라보이는 저 높은 곳에
오래된 교회가 있었다. 열차 시간 관계로 오를 수는 없었지만
두고두고 마음 속에 남아았는 교회를 배경으로 한 컷.
 
 
 
 
까맣게 윤기나는 말이 끄는 마차를 타고 
하얗게 눈 쌓인 성의 뒷뜰에서 즐기는 사람들.
 
2002. 1. 29.
 
그즈음 나는 아팠다. 그러나 귀국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고
어찌 렘브란트  전시를 보지 않을 수 있으랴.
쾰른에서 기차로 다섯시간 거리의 캇셀에 전시장은 있었다.

빌헤름스훼세 성이라고 높고 넓은 옛성에.
가는 길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눈 쌓인 길을  잎 진 나무들 사이로
걷는 기분.이라니...그렇게 아름다운 길을 걸어 본 건 처음 인 것 같다.
 
최영미 시인은 말했다.
-램브렌트 그림을 보기 위해서 유럽여행을 떠났다.-고.
전시는 1.2층은 15- 17세기 화가전이었고. 3-4층이 '렘브란트
그림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관람하고 있었는데 안내 아가씨는
30 센티미터 자를 가까이 대며 그ㅡ만큼의 거리를  두고 그림을
감상하라고했다. 몸이 불편했지만 무사히 감상하고 내려오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 -사람의 몸- 이란 걸 새삼 깨달았다.


 
 
그림 - 렘브란트 작, <야경>,  유명한 작품이다. <야경>에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대장 뒤에 서 있는 소녀와 그 소녀 주위로 블렌딩되는 빛과 어둠이다. 
 

 

 

렘브란트 Van Rijn Rembrandt(1606~1669)

영적(靈的) 세계를 표출(表出)

자화상


1628년경 
카셀 국립 미술관 소장

렘브란트는 63년이라는 길지도 않은 생애에 약 60점에 달하는 자화상을 남겨 놓고 있다. 이 방대한 자화상을 그린 화가는 서양 회화 사상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으며, 굳이 비길 만한 예를 찾자면, 짧고도 비극적인 생애를 산 같은 네덜란드 출신의 반 고호이다

 

목욕하는 수잔나.-1637 경

덴 하그 마우리츠하이스 미술관 소장.

루네상스 이래 줄겨 다루어진 테마.

 

 

토론하는 두 철학자. 1628년 경.

멜버른 국립 갤러리 빅토리아 소장.

라이덴 시대에 있어서의 명암의 대비가 강조된 그림.

 

 
 
Portrait of Nicolaes Ru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