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7년 4월 11일, 수요일, 맑음 >>
진이의 초대
원래 진이는 내가 노루실에서 살기 위해 산 개였다.
혼자 지내면 적적할 것 같아서 산 개였는데,
밀양에서 부산까지 출퇴근이 힘들어 부산으로 와 버리는 바람에
진이 혼자 노루실에 남았다.
먹이는 큰 그릇에 담아주고 오니까 보름 정도는 먹을 수 있는데
가장 큰 문제는 진이 혼자 지내니까 외롭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작은 개 한 마리를 더 넣어주나 어쩌나 고민하고 있는
참인데 진이가 새끼를 가져서 걱정을 덜게 되었다.
새끼 한 마리만 남겨두면 진이도 심심하지는 않을 것이다.


지난 토요일에 가서 진이 몸 상태를 보니 아직 며칠은 더 걸릴
것 같아서 부산으로 돌아왔는데 월요일 저녁에 반장집에서 전화가
왔다. 월요일 낮에 새끼를 낳은 것 같다는 전화였다. 대문을 잠궈
둔 탓에 직접 들어가 보지는 못하고 멀리서 살펴본 모양이었다.

그래서 10시가 다 된 밤에 마트로 가서 생선을 사 가지고 노루실로
달려갔다.
아내는 밤에 가려니 을씨년스러운지 처음에는 툴툴거렸지만 막상
노루실에 가서 진이가 낳은 새끼를 들여다보니 자신이 아기를 낳은
때가 떠올라 안쓰러웠는지 잘해 주려고 애썼다.
밤 11시가 넘어서 노루실에 도착하여 진이 집에 가보니 진이는
집 옆에 있는 땅을 파서 흙구덩이 속에 새끼들을 낳아놓은 상태였다.
아직 노루실의 밤은 제법 춥기 때문에 새끼들이 추위 속에서
몸을 옹송그리며 떨고 있었다.
( 진이가 파 놓은 구덩이 )

나는 혹시나 진이가 신경이 예민해져서 물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조심 조심 새끼들을 한 마리씩 집어 집안으로 넣어주었는데
진이는 주인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개라서 그런지 우리를 반겨주었다.
새끼들은 모두 5마리였다. 진이가 놀랄까 봐 자동차 불빛도 다 끈
상태라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하얀 색깔이 많았다. 강아지들은
생쥐처럼 작아서 한 손에 쏙 들어왔다.
그렇게 작은 것도 생명이라고 손가락에 잡힌 채 꼬물거리는 것을
보니 내가 아기를 낳은 것처럼 가슴이 뭉클해졌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데 진이가 저 혼자서 새끼를 다섯 마리나 낳은
것을 보니 참 대견하였다.
그 동안 아내는 개 때문에 할 수 없이 시골에 가야 한다며 불평을
한 적도 있었는데 나는 이 강아지들을 보며 진이를 처분하지 않은
것을 천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개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귀찮게 오가는 것이 아니라 개 덕분에
맑은 공기도 마시고 시골 나들이도 하고 좋은 물도 마시고 꽃이
피는 것도 보고... 이런 호사가 어디에 있을까?
진이는 혼자 앵두꽃이 피는 걸 보기가 아까워서 나를 부른
것이리라.
우리집에 꽃이 피었으니 보러 오라고 해도 과연 몇 사람이나 선뜻
찾아 올 것인가? 내가 바쁜 일 미뤄두고 진이의 초대에 응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나는 아이를 세 명이나 길러보았지만 정작 우리 애들을 키울 때는
세상 살이 경험이 없어서 무덤덤하게 보냈다.
그런데 이번에 진이가 강아지를 낳는 과정을 보니 생명의 잉태와
탄생이 얼마나 신비한지를 새삼스럽게 느꼈다.
넓은 마당에서 혼자 살며 고독과 싸워 이긴 진이. 생명은 참으로
질기고 모진 것이다.
살아서 꿈틀거리는 강아지들을 보니 갑자기 큰 부자가 된 것 같고
우리 집에 난데없는 행운이 굴러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진이는 어둠 속에서 눈망울을 껌벅거리며 내게 이렇게
말하는 듯 했다.
"이봐요. 나도 고독을 이기며 새끼를 다섯이나 낳았는데 당신은
인간이면서 뭘하는 거요? 명색이 작가라면서 나처럼 자식을 쑥쑥
낳아보았나요? 정신 좀 차려욧!"
내가 언제 책을 내었던가?
동화책을 5권 낸 뒤로 어느새 7-8년이 지났지 싶다. 나는 진이를
보며 나도 분발하여 앞으로 동화책을 5권 이상 펴낼 생각이다.
내가 세상을 마칠 때까지 이 목표를 이룰 수 있을지 모르지만
진이가 살아 있는 한 내 목표도 흔들리지 않으리라고 본다.
진이는 나를 볼 때마다 나에게 말없는 교훈을 심어줄 테니까.
내가 부산에서 노루실을 오가며 진이를 키우는 게 아니라
진이가 노루실에서 나를 초대하며 오히려 더 많은 가르침을 주는
것 같다.
나는 앞으로 일주일 동안 노루실에 머물며 진이의 산후 뒷바라지를
해줄 작정이다.
아내도 진이가 염려되는지 벌레 쫓는 개 목걸이도 사다 주려 하고
우유도 사 오라고 부탁했다.
어젯밤에 노루실에 가보니 아내가 진이 먹을 것을 여러 봉지에
나누어서 주기 좋도록 해 놓았다.
내 고집을 꺾지 않고 많이 도와주는 아내도 참 고맙다.
진이야, 맛있는 음식 많이 만들어 줄 테니 어서 회복해.
정말 수고했다!
나를 자주 노루실로 초대해다오!
아무리 바쁜 일이 있더라도 미뤄두고 달려가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