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창작

[스크랩] 시와 동화에 실린 조희양의 최신작(초록아이)

凡草 2008. 4. 19. 23:27


초록 아이
조 희 양

봄바람이 금빛 햇살부채를 나올나올 부쳤습니다.
더는 간지럼을 견디지 못한 잎싹과 꽃싹들이 몸을 내밀었습니다.
온 세상이 햇살로 가득 차서 차가운 빌딩도 손을 대어보면 따뜻했습니다.
하얀색 병원 창문으로 단발머리 여자 아이가 고개를 쏘옥 내밀었습니다. 열 살 남짓 되어보였습니다. 눈이 부신지 실눈을 뜨고 창밖을 살피던 아이는 두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리곤 배딱배딱 손을 뒤집어 가며 햇볕을 쬐었습니다.
그러더니 누워 계신 할아버지 볼에 손을 갖다 대었습니다.
“할아버지, 따뜻하지?”
“아이구, 우리 향이가 할애비를 위해 두 손에 봄 햇살을 가득 담아 왔구나.”
할아버지가 웃었습니다. 움푹한 할아버지 볼에 하얀 비듬이 꼈습니다. 향이는 손톱을 세워 살살 긁어보았습니다. 아침저녁 물수건으로 닦아드리는데도 하얀 때가 일었습니다.
“우리 향이는 막 돋은 새싹이니 온 몸이 반짝거리는구나. 할애비는 이제 썩을 일만 남은 오래된 나무란다.”
가래가 섞인 할아버지 목소리는 으그르르 거렸습니다.
향이는 할아버지의 잔물잔물한 눈가를 깨끗한 수건으로 닦았습니다. 그리고는 이불 밖으로 삐쭉 나온 할아버지의 깁스한 다리를 바라보았습니다.
지난겨울에 교통사고가 났었습니다.
할아버지 다리는 나이가 많아서 좀체 낫지 않는다고 의사 선생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자동차 바퀴에 치어 넘어지면서 뼈에 금이 갔는데 나으려면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입니다. 처음엔 병문안 오는 사람도 많았지만 이젠 오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할아버지를 다치게 한 아저씨도 병원비를 매달 인터넷으로 낼뿐이었습니다.
할아버지와 향이는 둘만 살았습니다. 부모님은 향이가 유치원 다닐 적에 돌아가셨습니다. 할아버지는 향이에겐 엄마도 되고 아빠도 되었습니다. 향이는 할아버지 없는 세상을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할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하자 집에 혼자 있기가 무서운 향이는 병원에서 학교를 다녔습니다.
향이와 이야기를 나누던 할아버지가 낮잠을 주무십니다. 할아버지는 주무시면서 칼락칼락 기침을 했습니다. 벌린 입안에선 냄새가 났지만 그래도 향이는 할아버지 곁에 있는 것이 제일로 좋았습니다.
숙제를 다 하곤 필통을 닫으려던 향이 눈에 초록색 사인펜이 들어왔습니다. 아기다람쥐들이 그려진 사인펜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향이는 그걸 빙글빙글 돌렸습니다. 사인펜 속 다람쥐가 마치 체 바퀴를 도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향이는 뭔가 좋은 생각이 난 듯 사인펜 뚜껑을 열었습니다.
뻣뻣한 할아버지 다리에 사인펜으로 초록 잎사귀 한 장을 가만 그려보았습니다. 한 장, 두 장…. 그림을 그리는 향이 눈에 물안개가 뽀얗게 피어올랐습니다.
‘집에 가고 싶어. 할아버지랑 집에 가고 싶어.’
향이의 눈에 고인 눈물 때문에 크고 작은 초록 잎사귀들이 흔들렸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언제 들어왔는지 낯익은 애가 향이 앞에 서 있었습니다. 불룩한 초록색 자루를 안고 말입니다.
“안녕!”
그 애는 잎사귀에 구르는 이슬처럼 상큼한 목소리로 인사를 했습니다.
향이는 급히 눈물을 닦느라 초록 사인펜을 떨어뜨렸습니다.
“누구야?”
그러고 보니 그 애는 향이와 똑같은 단발머리에 똑같은 생김새를 하고 있었습니다.
“나도 향이야. 네 안에 있는 향이. 네 안엔 여러 향이가 있단다. 착한 향이, 욕심 많은 향이, 우는 향이, 꿈꾸는 향이…. 그 중 난 도우미 향이야!”
고개를 갸웃거리던 향이는 도우미 향이가 갖고 있는 커다란 자루를 보았습니다.
“그게 뭐야?”
“이거? 네가 할아버지 다리에 잎사귀 그리는 걸 보고 내가 가져온 거야. 얘, 사인펜으로 그게 뭐니? 쩨쩨하게. 적어도 이 정도는 돼야지. 짜잔!”
도움이 향이가 자루를 거꾸로 들었습니다. 쑤쑤쑤쑤, 초록잎사귀가 쏟아졌습니다.
향이 눈이 불 켠 등잔처럼 커졌습니다. 얼쯤얼쯤하던 향이가 잎사귀를 만지작거리자 도우미 향이가 말했습니다.
“맑은 바람과 새만 찾아오는 깊은 산속에서 따 온 거야. 어때, 한 번 맡아봐!”
도우미 향이 말에 향이가 잎 냄새를 맡았습니다. 싱싱한 풀내음이 코에 스미자 향이는 상그레 웃었습니다.
“할아버지 다리에 붙이는 거야. 왜 고목나무에 꽃 피운다 하잖아. 우린 잎을 피우는 거야. 헤헤.”
도우미 향이가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향이가 얼른 도우미의 입을 막았습니다.
“쉿! 얘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하니? 할아버지 들으시면 어떡하려고.”
향이와 도우미 향이는 할아버지 다리를 한 쪽씩 잡고 잎사귀를 붙였습니다.
“우리 주문을 외우며 하자.”
“주문? 할아버지 빨리 일어나시란 주문?”
향이가 잎사귀를 가지런히 챙기면서 물었습니다.
“그렇지! 주문을 만들어봐.”
“우리 할아버지, 곰지락곰지락!”
향이가 할아버지 발가락에 작은 잎사귀를 끼우면서 주문을 외웠습니다. 내내 잠만 자는 할아버지 다리가 천천히 가볍게 움직였습니다.
“오호, 제법인데! 할아버지, 성큼성큼!”
도우미 향이가 잎을 빙글빙글 돌리다가 할아버지 종아리에 붙였습니다. 할아버지는 빙긋 웃으시며 씩씩하게 걸었습니다.
향이는 마음이 급해졌습니다. 그만 손이 떨려 잎을 떨어뜨리고 말았습니다.
“토끼처럼 깡창거리면 안 돼. 다시 시작!”
도우미 향이가 짧으면서도 힘 있게 말했습니다.
“할아버지…할아버지…닁큼닁큼!”
향이는 숨을 크게 쉬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망설이지 않고 재빨리 움직였습니다.
“우리 할아버지, 당실당실!”
도우미 향이는 어깨춤을 추면서 잎을 붙였습니다. 흥에 겨운 할아버지가 두 향이를 빙빙 돌며 춤을 추었습니다. 향이는 잎 붙이는 일이 아주 신났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엄마야! 이게 뭐야?”
잎을 붙이던 향이가 기겁을 하며 팔을 떨쳤습니다. 작은 벌레가 바닥에 툭 떨어졌습니다.
“난 또 뭐라고. 자벌레야. 이 녀석이 널 보고 싶어 따라 왔나봐.”
별일 아니란 듯 도우미 향이가 자벌레를 손바닥에 올렸습니다. 놀란 벌레는 콩처럼 동그랗게 몸을 말았습니다. 도우미 향이는 벌레를 제 머리에다 붙였습니다. 마치 머리핀 같았습니다. 향이는 이 소동에도 주무시는 할아버지를 바라보곤 주문을 외웠습니다.
“우리 할아버지 발룩발룩!”
향이가 옹이처럼 거뭇한 무릎을 쓰다듬다 잎을 소복이 붙였습니다. 갑자기 할아버지 무릎이 오므라졌다 쭉 펴지더니 오므라졌다 또 펴졌습니다.
“우리 할아버지, 푸두둥푸두둥!” “얘!”
향이가 잎을 부치다 벌떡 일어나 도우미 향이를 불렀습니다. 신나게 날개 짓을 하며 창가로 달리던 도우미 향이가 놀라서는 뒤돌아봤습니다.
“너는 우리 할아버지가 꿩인 줄 아니? 날 두고 날아가길 바라는 거야?”
향이가 눈을 할깃 흘겼습니다.
“아, 미안, 미안. 난 앞서가는 게 문제란 말이야.”
도우미 향이는 달려와서 손을 싹싹 비는 흉내를 냈습니다. 향이는 그런 도우미 향이를 바라보면서 맘속으로 말했습니다.
‘네가 내 안에 있어줘서 고마워.’
다시 번갈아 외는 주문이 이어졌습니다.
“우리 할아버지, 겅중겅중!”
할아버지는 긴 다리로 힘차게 높이 솟구쳐 뛰다가 향이 앞에 우뚝 섰습니다. 할아버지는 두 팔을 위로 쭉 뻗었습니다.
할아버지 두 다리는 잎이 가득 핀 나무가 되었습니다. 두 향이는 일을 다 끝냈다는 듯 손을 탁탁 털었습니다. 그런데 펄펄 날 것만 같았던 할아버지 나무는 어쩐지 잠을 자는 것처럼 생기가 없어 보였습니다. 향이가 울상을 지었습니다. 도우미 향이가 그런 향이의 손을 꼭 잡았습니다.
“휘이익!”
도우미 향이가 새처럼 입을 오므려 휘파람을 불었습니다.
그러자 창밖의 명주실 같은 햇살들이 쉴 새 없이 들어와 할아버지를 감쌌습니다. 빛살이 쏙쏙 스민 초록 잎들이 사사삭, 사사삭. 깨어나 반짝거렸습니다. 어느새 할아버지 다리는 세상에서 가장 푸른 나무가 되었습니다.
“우와!”
향이는 눈앞에 벌어진 광경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습니다. 향이는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음, 음, 향이야 물 좀….”
할아버지가 뒤척이며 향이를 불렀습니다.
순간 눈을 동그랗게 뜬 도우미 향이가 서둘렀습니다. 향이가 붙잡을 새도 없이 창문을 훌쩍 넘은 도우미 향이가 빈 초록자루를 흔들며 윙크를 보냈습니다.
창문으로 들어온 햇살에 푸른 할아버지나무가 오래 오래 반짝였습니다.

(((끝)))
출처 : 글나라
글쓴이 : 화실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