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창작

[스크랩] [ 김은아 ] 제6회 황금펜아동문학상 동화 당선작

凡草 2010. 2. 17. 14:25

 

 

□  제6회 황금펜아동문학상 동화 부문 당선작


언니 안 할래

                              김은아 pirinamu@hanmail.net




 비에 흠뻑 젖어 본 적이 있나요?

난 지금 그렇게 해 보려고요. 그래서 집까지 데려다 주겠다는 친구를 굳이 먼저 보내 버렸어요.

아홉 살 먹은 여자 애가 우산도 없이 빗속을 걸어간다면 엄청 불쌍해 보일 거예요. 어쩌면 펄펄 끓는 열 감기에 걸릴지도 몰라요. 그러면 엄마는 내가 걱정돼서 눈물을 글썽거릴 거예요. 내 동생 서인이가 입원했을 때처럼. 그런 고약한 상상을 하며 비를 맞고 한 열 걸음쯤 갔을 때였어요.

“이-리-로오 와아.”

 산 속에서 들었던 메아리 소리 같아요. 난 얼른 뒤를 돌아보았어요. 그런데 아무도 안 보여요. 가로수들만 줄지어 서 있을 뿐이었지요. 우산을 씌워줬던 효연이는 벌써 횡단보도를 건너 저만치 가고 있었어요. 잘못 들었나 봐요.

“여어기.”

다시 발걸음을 떼려 하는데 아까처럼 낮은 메아리가 다시 말을 건네요. 아무래도 한 줄로 서 있던 나무들 사이에서 나는 소리 같아요.

 나는 나무쪽으로 다가갔어요. 그리고 햇빛을 가릴 때처럼 두 손을 이마에 대고는 나무들을 올려다봤어요.

“나한테 말한 거야?”

그러자 그 중에서 가장 뚱뚱한 나무가 기다렸다는 듯이 가지를 아래위로 흔들어댔어요. 서인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처럼요.

“근데, 왜?”

 그때였어요. 갑자기 하늘이 깜깜해지더니 굵어진 빗방울이 타다다 소리를 내며 마구 쏟아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난 나도 모르게 뚱보 나무 아래로 바짝 다가섰어요. 나무도 가지를 아래쪽으로 늘어뜨려 비를 막아 주었어요. 마치 커다란 거인 우산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아요. 비는 점점 더 세차게 내려요.

“나 우산 씌워 주려고 부른 거야?”

“탁 탁 타다닥 다라락 닥 닥.”

 대답이 없어요. 빗방울만 신나게 나뭇잎 위로 떨어질 뿐이에요. 난 가만히 빗소릴 들으며 한참을 서 있었어요.

 엄마가 씌워준 우산이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것도 단 둘이만 말이에요. 하지만 엄마는 동생에게 갔을 거예요. 난 동생보다도 두 살이나 많은 언니니까 조금 기다려도 된대요. 하지만 이제는 조금도 기다리기 싫어요. 왜 동생은 기다리면 안 되는 거죠?

어느새 엄마랑 서인이가 뚱보 나무 앞으로 오고 있는 게 보여요. 엄마의 한 손에는 내 딸기 우산이 들려 있어요. 서인이가 쓰고 있는 거랑 똑같은 딸기 우산이지요. 서인이는 내가 가진 거라면 뭐든지 갖고 싶어하니까요.

“여기까지 비 맞고 왔어?”

“…….”

“서인이 유치원 버스 올 시간이잖아? 많이 기다렸구나!”

거인 우산에서 나온 나는 딸기 우산을 받아 들지도 않고 앞장서서 집을 향해 걸어갔어요.

“엄마, 엄마, 이 나무 좀 봐봐요. 혼자만 뚱뚱보 나무예요.”

뚱뚱보 나무라고? 치, 서인이는 내 생각까지 따라 하는 모양이에요.


 오늘 엄마는 학교 끝나면 곧장 집으로 오라고 세 번이나 말했어요. 밥 먹을 때랑 신발 신을 때, 그리고 엘리베이터 문이 닫힐 때도요.

“지금은 학교 가야 하니까 학교 다녀와서 얘기하자. 알았어?”

그래서 집에 가기 싫어요. 아침 먹을 때 서인이와 싸운 일로 꾸중을 들을 테니까요. 난 학교 후문 쪽에 있는 문방구에 갈지, 운동장에 있는 그네를 백 번쯤 타고 갈지 고민을 하고 있었어요. 실내화를 신주머니에 넣을 때까지만 해도요. 그런데 신발로 갈아 신고 나니 어제처럼 바람결에 낮은 메아리가 실려오는 거예요.

“내게로 와아.”

난 얼른 효연이를 쳐다봤어요.

“무슨 소리 들렸지?”

“무슨 소리?”

“잘 들어 봐. 메아리 소리 같은 거.”

효연이도 나와 함께 귀 기울이며 가만히 서 있었어요.

“여어기.”

나뭇잎이 바람에 날리는 소리 같기도 하고, 파도소리 같기도 했지만 분명했어요.

“못 들었어?”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데?”

 난 효연이에게 먼저 집에 가야겠다고 하고는 한숨에 뚱보 나무 앞까지 달려갔어요. 햇빛 아래에서 본 뚱보 나무는 유난히 크고 단단해 보였어요. 그냥 뚱보가 아니라 대장 나무 같았지요. 옆에 서 있는 다른 나무들이 졸병처럼 보일 정도로요. 나는 나무 꼭대기를 향해 고개를 한껏 쳐들었어요.

“네가 날 부른 거 맞지?”

어제처럼 시치미를 뗄 모양이에요. 쏴아아 소리를 내며 가지만 흔들어요. 그러자 나뭇잎들이 쏟아지는 햇빛을 받으며 은빛으로 반짝거렸어요.

아하. 오늘 받아쓰기 시험에 나온 ‘나뭇잎이 은빛으로 빛나’란 아마 이런 걸 말하나 봐요. 난 가만히 뚱보 나무에 등을 기대었어요. 때마침 불어온 바람이 내 머리칼을 쓰다듬고 지나갔어요.

나는 ‘은빛으로 빛나’에서 빛을 빚으로 쓰고 말았어요. 이것만 맞았더라면 엄마가 좋아하는 백 점이었을 텐데……. 받아쓰기는 정말 헷갈리는 게 많아요. 빛인지 빚인지 빗인지 내게는 다 같아 보이거든요. 그런데 시험을 보면 맞는 글자는 딱 하나뿐이에요.

그래서 엄마가 항상 하는 말, 나와 서인이를 똑같이 사랑한다는 말도 사실이 아닐지 몰라요. 우린 얼굴이랑 목소리랑 좋아하는 것까지 비슷하지만 똑같지는 않은 걸요. 똑같지 않은데 어떻게 똑같이 사랑할 수가 있나요?

아침에도 엄마는 나만 혼냈어요. 내가 서인이에게 꿀밤을 준 것은 서인이가 하나 남은 계란말이를 먹어버리고 혀를 쑥 내밀었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엄마는 내 얘긴 들어보려고 하지도 않았지요. 유치하지만 난 엄마가 나와 서인이 중에 누굴 더 사랑하는지 그게 궁금해 죽겠어요.

오래 있을 생각은 아니었어요. 받아쓰기 이야기만 해주고 집에 갈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나무는 내 얘기가 재미있나 봐요. 받아쓰기 얘기를 해 주자 쓰기 시간에 얼마나 팔이 아팠는지도 궁금하대요. 수학 시간에 배운 길이 재는 방법도 알려 달래서 내 발끝부터 머리 꼭대기까지 뚱보 나뭇잎으로 재서 어림하는 방법도 알려 주었어요.

뚱보 나무는 내가 이야기하는 동안 다른 곳은 쳐다보지도 않고 내 얘기만 들어요. 지나가던 남자애들이 공으로 툭툭 건드릴 때도 내 얘기만 듣겠대요. 그러다 보니 어느새 집에 갈 시간이 훌쩍 지나버리고 말았어요.

 아침에 곧장 집으로 오라던 엄마 말이 떠올라서 난 깜짝 놀라 집으로 달려갔어요. 하지만 엄마는 이미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나서 내게 큰 소리로 혼내시고는 한 번만 더 늦으면 아예 문도 안 열어주겠다고 협박까지 하시는 거예요.

엄마에게 내가 왜 늦었는지, 아침에 서인이가 얼마나 얄미웠는지 말해주고 싶었지만 엄마는 ‘이따가’라고 하고는 화분에 물을 주러 가 버렸어요.

내 얘기는 늘 설거지 다음이거나 전화 통화 다음이거나 공부 다음으로 미뤄지지요. 그러다가 엄마가 ‘아까 뭐라고?’하고 물어볼 때면 난 더 이상 어떤 말도 하고 싶어지지가 않아요.

나는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가 버렸어요. 그리고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지요. 서인이가 밖에서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려요. 엄마도 방문을 두드렸어요. 하지만 난 더 열심히 울기만 했어요. 아침의 계란말이도 생각나고, 고장 난 춤추는 인형도 생각나고, 작아져서 서인이에게 물려준 분홍 원피스로 생각났어요. 그렇게 한참을 울었더니 마음이 한결 시원해졌어요.

“서현아, 밥 먹고 자야지.”

울다가 잠이 들었나 봐요. 난 이불 위에서 베개까지 베고 있었어요. 엄마가 엉덩이를 토닥거리며 날 깨웠어요. 서인이를 깨울 때처럼요.

“언니, 계란말이 많이 했어. 빨리 와.”

식탁에는 계란말이가 한 접시 가득 있었어요.


 어제 그렇게 혼이 났으니 오늘은 꼭 집에 빨리 가야만 해요.  그래서 뚱보 나무에 가까워지자 양손으로 귀를 막았어요. 날 부르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요.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는 것은 정말 가슴 아픈 일이에요. 그리고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지요. 그랬더니 뚱보 나무는 나뭇잎을 발밑에 깔아놓고 날 미끄러지게 했어요. 어쩔 수 없이, 정말 어쩔 수 없이 뚱보 나무 밑에 잠시 앉아 있기로 했지요.

그때 가방에 든 초코바가 생각났어요. 오늘 성현이가 친구들에게 하나씩 나눠준 초코바예요. 집에 가져가서 먹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어요. 서인이가 먹고 싶다고 떼를 쓸 게 뻔하니까요. 그러니까 초코바 하나를 다 먹을 때까지만 있다가 갈 거라고 뚱보 나무에게 말했어요. 하나를 다 먹어도 더 먹고 싶은데 나눠 먹는다면 아빠 말처럼 입맛만 버리는 거잖아요?

초코바 껍질을 벗기고 한 입을 크게 베어 물었어요. 초콜릿 가루가 셔츠 위로 떨어졌어요. 옷에 달라붙기 전에 털어내려고 벌떡 일어서는데 발밑을 지나는 왕개미 한 마리가 눈에 띄어요. 갈색 나방을 등에 지고 어딘가 바삐 가고 있어요.

나방의 몸집이 개미 스무 마리보다도 더 커 보였지요.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본 개미하고 똑 같아요. 개미는 먹이를 구하면 혼자 먹는 게 아니라 집까지 가져가서 함께 나눠 먹는댔어요. 지금 이 개미도 먹이를 나르는 중인가 봐요.

개미의 커다란 나방을 보다가 내 초코바를 다시 쳐다보았어요. 그리고 뚱보 나무 꼭대기를 쳐다봤지요.

“내 초코바가 이것보다 더 컸더라면 나도 나눠 먹었을 거야.”

그리고는 남은 초코바를 한 입에 쏘옥 집어넣었어요. 그리고 집을 향해 달려갔어요. 뒤에서 뚱보 나무가 까르르 까르르 웃는 것만 같았어요.


누군가 항상 날 기다려준다는 건 참 신나는 일이에요. 난 학교가 끝나기가 바쁘게 뚱보 나무에게로 갔어요.

“나 말이야, 아빠가 아침에 키 재 보더니 5센티미터나 컸대.”

그리고 예전처럼 뚱보 나뭇잎으로 내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재어 보았어요. 지난번에 나뭇잎 몇 개였었는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래도 보여주고 싶었거든요.

뚱보 나무가 나뭇잎을 빨갛게 물들였다가 그 잎들을 바닥에 떨어뜨리는 동안 나도 보이지 않게 자라고 있었던 거예요.

뚱보 나무는 남은 잎들을 내 머리 위로 떨어뜨려 주었어요. 뚱보 나무가 주는 선물인가 봐요. 유난히 예쁜 잎들이에요. 나는 그 중에서 두 개를 골라 ‘즐거운 생활’ 책 속에 끼워 넣었어요.

“하나는 서인이에게 줄 거야.”

뚱보 나무가 물어본 것도 아닌데 난 꼭대기를 쳐다보며 큰소리로 말했어요. 그런데 이렇게 다 잎을 떨어뜨리고 나면 뚱보 나무는 너무 추워지지 않을까요? 비를 막아줬던 나뭇잎들은 거의 환경미화원의 포대 속으로 사라져 버렸거든요.


오늘은 정말로 잊을 수 없는 날이 될 거예요.

윙 하는 소리가 학교 교문을 나설 때부터 들려 왔지요. 집으로 가는 길에는 잘라 낸 나뭇가지들이 군데군데 모아져 있었어요. 기분이 이상하게 나빠지기 시작했어요. 내 뚱보 나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게 틀림없어요. 가슴이 막 콩닥거렸어요.

뚱보 나무는 가지가 여러 개 잘려나간 모습으로 서늘하게 서 있었지요. 눈물이 핑 돌았어요.

“많이 아팠지?”

내 키가 아주 컸더라면 잘려나간 자리에 ‘호’ 하고 불어 주었을 거예요. 하지만 나는 뚱보 나무 껍질을 살살 어루만져줄 수밖에 없었어요. 그때였어요. 낮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어요.

“걱정하지 마. 더 좋은 나무가 되는 거야.”

“더 좋은 나무?”

“나무는 말이야, 욕심껏 가지를 붙잡고 있으면 잘 자랄 수가 없어. 잘 자라려고 가지를 잘라주는 거야.”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한 수수께끼 같아요. 나는 아주 오랫동안 뚱보 나무에 기대어 앉아 있었어요.

“언니, 여기서 뭐해?”

 엄마 손을 잡고 나온 서인이의 머리에 분홍색 곰돌이가 있어요. 아빠가 내 생일 선물로 사다 준 머리핀이지요. 난 벌떡 일어섰어요.

“너, 그 핀 어디서 꺼냈어?”

 서인이가 도망가기 시작했어요. 난 엄마에게 가방을 맡기고 서인이 뒤를 쫓아갔지요. 1층 현관 앞에서 겨우 서인이를 붙잡았어요. 얼마나 숨차게 뛰어왔던지 얼굴까지 빨개져 있었어요. 억지로 뺏어 버릴까 하는 생각도 잠깐 들었지만 조금만 참아주기로 했어요.

“오늘 한 번만이야. 빌려주는 거라고. 알았어?”

서인이가 숨을 할딱거리며 고개를 끄덕였어요.

 이제 겨울이 되면 난 열 살이 될 거예요.

그리고 어쩌면 더 좋은 언니가 될지도 모르겠어요. 졸병 나무보다는 대장 나무가 훨씬 멋있잖아요? (*)


출처 : 글나라
글쓴이 : 凡 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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