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6회>
달팽이가 좋아하는 신선초
< 2010년, 10월 23일, 토요일, 맑음 >
범초산장에서 아침에 눈을 뜨면 공기가 다르다.
주변 풍경도 다르다. 양산 우리집은 건물들로 둘러싸여 있어서
초록색을 찾으려면 멀리 오봉산을 바라보아야 하는데
수내 범초산장에서는 양 사방이 초록색이다.
가수 장사익씨는 안방에서 통유리로 북한산을 바라보기 위해 거금을 들여
집을 샀다고 하는데 난 큰 돈 안 들이고 범초산장을 마련했다.
동주와의 인연을 감사히 생각한다.
아침에 범초산장에서 눈을 뜨는 순간부터 행운을 만난다.
초록숲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가!
요즘에는 하루가 다르게 단풍드는 모습도 참 보기 좋다.



아침 먹기 전에 배추밭에 가서 달팽이를 잡았다.
지난주에 배추밭에 물을 주다가 달팽이가 배추잎에
붙어 있는 것을 보았다. 배추잎에 구멍이 왜 그렇게
많이 뚫렸는지 몰랐는데 알고 보니 달팽이가 한 짓이었다.
그래서 물을 주고 나서 달팽이를 열 마리 정도 잡았다.
오늘은 물을 주기 전에 달팽이부터 잡기로 했다.
몇 마리 잡고 나서 물을 주었다.
호스로 물을 뿌려주었더니 배추 속에 숨어 있던 달팽이들이
위로 올라왔다. 다시 달팽이를 잡았다.


그런데 배추밭을 다 뒤지고 나서 약초 밭을 돌아보다가
신선초에 달팽이가 붙어 있는 것을 보았다. 신선초 잎을
뒤집어 보니 달팽이가 계속 나왔다. 이건 한 마리 두 마리가
아니었다. 신선초 한 그루에 열 마리가 넘게 붙어 있었다.
여기 저기 뒤져보니 달팽이가 드글드글 했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많았다. 배추는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달팽이는 신선초를 제일 좋아하는 모양이다. 톱풀이나 삼백초에는
달팽이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달팽이도 신선초를 먹고 신선이
되고 싶었나?
여름 이후에는 신선초 잎이 억세어져서 안 뜯어먹었는데
내가 안 뜯어먹는 사이에 이 녀석들이 실컷 뜯어 먹었다.
신선초는 폭탄을 맞은 것처럼 잎마다 구멍이 뚫려 있었다.
안 되었지만 달팽이를 보이는 대로 다 잡아내어 저수지에
던져버렸다.
달팽이가 좋아하는 신선초를 나도 먹으려고 한 움큼 뜯어서
끓는 물에 데쳐 먹었다. 아내는 향이 강하고 질기다며 먹지
않았지만 나는 달팽이를 생각하며 꼭꼭 씹어 먹었다.
달팽이 잡느라고 아침 운동 한 번 잘 했다.

내가 달팽이를 잡는 동안 동주가 와서 배롱나무 주위에 돌을
예쁘게 쌓았다. 동주는 참 솜씨도 좋다. 내가 하면 하루 종일 걸릴
일을 금방 뚝딱 해치워 버린다.
동주는 올 때마다 화분이든 컵이든 한 가지 이상은 꼭 들고 온다.
꼭 우렁 각시 같다. 아니 우렁 각시가 아니라 우렁 후배다.

아침을 먹고 나서 왕고들빼기 씨앗을 받았다. 집 뒤편
도라지집과 경계가 되는 곳에 왕고들빼기가 있길래
씨를 받아 범초산장 구석 구석에 뿌렸다.
왕고들빼기는 내가 좋아하는 쌈 재료다.

이땅바다와 함께 만든 밭에는 무가 많이 자랐다.
상추는 싹이 여전히 안 나오는데 동주 말을 들으니 메추라기 똥이
너무 독해서 그렇단다. 메추라기 똥을 뿌린지 며칠 지나서 씨를
뿌려야 하는데 바로 뿌려서 죽은 것 같단다.
그걸 보면 무는 참 강한 녀석이다. 배추나 상추는 환경이 좋은 곳에서만
잘 자라는데 무는 어디든 가리지 않고 잘 자란다.
무처럼 아무 데서나 적응을 잘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메리 골드가 만개했다. 늦게 심어서 꽃을 못 볼 줄 알았는데
걱정 말라는 듯이 잘 피었다.
다른 꽃씨도 꽤 많이 뿌렸는데 어디로 갔는지 없고 메리골드만
살아 남았다. 메리골드도 무처럼 적응력이 강하다.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까탈스럽거나 약삭빠른 사람보다는
무던하고 수더분한 사람이 어딜 가나 환영받는다.
때가 늦으면 늦는 대로 거름이 많으면 많은 대로 적으면 적은 대로
잘 자라준 무와 메리골드가 고맙다.

양산 우리집 미니 화단은 요즘 엉망이 되어 버렸다.
1층에 상가가 들어서기까지는 내가 화단을 잘 가꾸었는데
세를 내주면서부터 상황이 확 달라져 버렸다.
화단의 일부가 줄어들고 음식점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 그릇과
주방 기구를 갖다 놓아서 화단을 쓸 수 없게 되었다.
상가가 안 나갈 때는 융자금 이자 때문에 힘들었는데 막상 상가가
나가고 나니 내 화단이 망가져 버렸다.
이 세상에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고 다 좋을 수는 없나 보다.
한 가지가 좋으면 다른 한 가지는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폭탄을 맞은 듯 엉망진창이 된 화단 한 구석에서 그나마
수세미가 잘 자라고 있다.

천궁과 곤달비가 다 짓밟혀버린 수난을 위로라도 해주듯이
수세미가 열매를 주렁주렁 달고 있다. 한쪽 구석에서 옹색하게.
수세미 역시 어떤 악조건에서도 긍정적인 마음을 잃지 않는가 보다.
‘그래. 이제 집에서는 화단 가꾸기는 포기하고 범초산장에서나
가꾸어야지. 살아남은 몇 가지는 내년 봄에 범초산장으로 다 옮겨야겠다.
수세미, 너의 씨앗도 거기 심어주마. 이번 가을만 고생을 참아다오.’

내 화단이 망가졌는데도 나만 화가 날 뿐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같은 집에 살아도 생각이 다르고 취미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래서 나는 그냥 모른 척 한다.
언젠가는 나 혼자 범초산장에 가서 내가 좋아하는 약초와 나무를 키우며
나만의 진정한 행복을 누리고 싶다.
그날이 과연 언제 올 것인가? (*)
부산아동문학 세미나에 가서 만난 문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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