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꽃

[스크랩] 85편 *** 멀고 먼 정상

凡草 2005. 6. 10. 14:13

  멀고 먼 정상
 5월 5일이 결혼기념일이라 아내와 1박2일 등산을 가기로 했다.
 목적지는 김천시에 있는 ‘수도산’이었다. 
아내가 수도산이 좋다는 말을 어디서 듣고 그전부터 한 번 가보자고 했는데 
거리가 멀어서 미루다가 이번에 가게 되었다.
 수도산이 멀긴 멀었다.
 경북 오지에 꼭꼭 숨어 있는 산이었다.
 부산에서 구마 고속도로를 타고 현풍까지 간 다음에 다시 88고속도로를 타고 
고령까지 갔다가 거기서 성주 방향으로 59번 도로를 따라 올라갔다.  
 
 4일 오후에 학원을 마치고 올라갔기 때문에 성주 방향으로 달릴 때는
 이미 9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초행길인데다 어두워서 헷갈리는 곳도 있었지만
 지도를 보며 찾아가는 재미가 쏠쏠했다. 낯선 곳에 있는 산을 찾아가느라 
이런 여행을 가끔 해본 탓에 많이 헤매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나도 시행착오가 많았다. 엉뚱한 길로 들어가서 헤매기도 하고 
찾는 곳이 아니어서 되돌아 나온 적도 많았다. 
 미리 세심하게 길을 알아두지 않고 막무가내로 나섰다가 아내에게 잔소리도 
어지간히 들었다. 
 그런 경험이 쌓여 이제 웬만한 길은 눈짐작으로도 대충 알아차릴 수 있게
 되었다.
 성주댐 부근에 있는 신성 3거리까지 가니 금강산 모텔이 보였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10시 30분.
 지도를 보니 이쯤 왔으면 수도산이 가까운 곳이었다.
 그래서 거기서 자고 가기로 하고 방을 잡았다.
 숙소는 생각보다 깨끗하고 시설이 좋아서 마음에 들었다.
 늘 집에만 있다가 오랜만에 멀리 나오니 기분이 새롭고 마치 신혼여행이라도 
온 것 같았다. 
 우리는 결혼기념일을 자축하며 슈퍼에서 사온 맥주로 건배를 하였다.
 벌써 수도산의 정기가 맥주에 사르르 녹아들었는지 맥주 맛이 부산에서 
마시는 것과는 사뭇 달랐다. 알싸한 맥주향이 목을 타고 내려갔다. 
맥주를 마시는데 아들한테서 전화가 와서 축하를 받고 잠자리에 누웠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니 어느새 7시 30분.
 산이 높으니 서둘러야 할 시각이었다. 게다가 일기 예보에 오후쯤 비가 온다고
해서 마음이 바빠졌다. 급히 밥을 지어 먹고 점심은 캬레로 준비한 다음에 
수도산으로 달려갔다. 
 우리가 묵은 곳에서 수도산은 무주 방향으로 20분 거리에 있었다.
 관기까지 못 가서 <청암사> 표지판을 보고 따라 들어갔다. 청암사는 
비구니들이 있는 절이었는데 대대적인 증축 공사를 하고 있어서 사방에 
건축 자재가 널려 있었다. 공사중이라 약간 어수선하긴 했지만 계곡물이 촬촬 
떨어지고 주변 풍경이 좋았다.
 청암사 옆으로 수도산을 오르는 길이 열려 있었다. 그 길은 계곡으로 쭉 
이어져 있었다. 
산나물도 뜯고 가끔 보이는 들꽃도 찍어가며 쉬엄쉬엄 걸어 들어갔다.
   < 병꽃 나무 >
  

    <참꽃마리>
   


 제법 걸어 들어가니 이제 오르막길이 나왔다. 
 어느 산이든 마지막에는 오르막과의 한 판 승부를 벌여야만 한다.
 아무리 낮은 산이라도 결코 순순히 꼭대기를 내어주지는 않는 법이다. 
숨이 턱에 차도록 헉헉거려야만 겨우 정상을 밟을 수가 있었다. 
낮은 산이라도 절대로 만만하게 볼 수는 없었다. 이쯤이야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가 된통 큰코 다친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도 오늘은 처음부터 가파른 오르막이 이어지지 않아서 그리 힘들지는
 않았다. 천천히 힘을 아껴가며 산을 올랐는데 드디어 가장 높은 곳 봉우리가
보여서 이게 정상인가보다 하며 올랐더니 정상은 아직 더 멀리 떨어져 있었다. 
비가 오려는지 하늘이 흐려지며 사방에 안개가 끼기 시작했다.
 약간 걱정되는 마음으로 길을 재촉하는데 몇 사람이 위에서 우르르 내려왔다.
  < 광대수염 >

 “안녕하세요?”
 내가 인사를 하였더니 내려오던 사람 하나가 이런 말을 하였다.
 “지금 정상에는 비구름이 잔뜩 끼어서 곧 비가 쏟아질 것 같던데요. 
올라가기가 힘들 겁니다.”
 그 말을 들으니 더 올라가고 싶은 마음이 싹 가셨다. 비가 쏟아진다는데 
어떻게 정상까지 간단 말인가? 혹시 조난이라도 당한다면......
 그렇지만 여기서 그냥 돌아갈 수는 없었다. 이 멀고 먼 수도산을 언제 
또 찾아올 것인가? 
나는 문득 지리산에 가서 종주 하던 경험을 떠올렸다.
 
          < 신나무 >
  


 
 ‘그래. 이 까짓 것은 아무 것도 아냐. 고작해야 1317미터 밖에 안되잖아. 
지리산은 이보다 더  험한데도 비를 맞으며 걸었잖아. 우비도 있는데 뭐가 
걱정이야. 가는데까지 가보자. 내려올 때 내려오더라도.’
 내가 만약에 비를 맞으며 지리산 종주를 한 경험이 없었더라면 지레 겁을 
집어 먹고 도로 내려왔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보다 더 힘든 산행을 
해보았기 때문에 겁먹지 않았다. 비가 올 테면 와봐라. 당당하게 맞설 테니까.
   < 쪽동백나무>


다행히 아내도 별 말이 없었다. 아내가 한사코 내려가자고 했으면 나도
 어쩔 수 없이 내려갔을 텐데 묵묵히 앞서 가고 있었다. 
사람이 살아가다 보면 항상 5대 5의 상황을 맞게 된다.
자기 마음속의 선과 악, 부모와 자식, 친구와 나, 남편과 아내, 
아들과 딸 등... 승률이 반반인 경우에 조금이라도 우세한 쪽이 다른 쪽을 
끌고 간다. 누가 더 강하느냐에 따라 승패가 엇갈린다.
 나는 아까 그 사람들이 해준 말을 떠올리며 남이 힘든 경우를 보면 
부정적인 말보다는 좀더 긍정적인 말을 해주기로 마음 먹었다.
   < 콩제비꽃 >

 얼마를 갔을까! 눈앞에 높은 봉우리가 보였다. 
이제 거기만 올라가면 정상이겠지 하고 힘을 내어 올라갔더니 이게 
어찌된 일인가! 거기서부터 아직도 1킬로미터가 남았다고 적혀 있었다. 
아이쿠! 정말 정상은 멀구나! 
 산에서의 1킬로미터는 평지에서의 그만한 거리하고는 비교가 안 될 만큼 
멀다. 사방에 안개가 잔뜩 드리워지면서 비가 금방이라도 쏟아지려고 하는데 
이대로 더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아내는 조금 망설이는 눈치였다. 
나는 이왕 내친 걸음이니 끝까지 가고 싶었다. 
 “비를 맞더라도 정상까지 가보자구.”
 내 말에 아내도 순순히 따랐다. 
 그러는 동안에 비가 몇방울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제발 정상에 오를 때까지는 비가 많이 오지 않기를 빌면서 발걸음을 
재게 놀렸다. 
 
정상은 정말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흡사 정상처럼 생긴 봉우리를 
세 개나 넘었는데도 보이지 않았다. 정상은 안개 속의 섬처럼 어딘가에 깊이 
숨어 있었다. 정상이 이렇게 머니 누가 쉽게 오를 수 있겠는가? 
낮은 산이야 별로 힘들이지 않고 오를 수 있지만 높고 험한 산은 여간해서는 
오르기가 어렵다.
 
 글쓰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신춘문예나 장편 동화 당선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몇 번 하다 안 되면 포기해버린다. 
힘들다고 뒤돌아선 바로 그 지점에서 조금만 더 가면 정상이 있는데도 말이다. 
산이든 글쓰기든 정말로 영광스러운 자리는 쉽게 오를 수가 없다.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다리가 저릴 만큼의 고통을 겪은 다음에야 겨우 차지할 수 있는 
것이다. 
 정상이란 자리는 땀과 눈물과 한숨과 고통을 요구한다. 
 고생하지 않고 쉽게 얻을 수 있다면 보나마나 시시한 것들뿐이다.
 다행히 비는 정상에 오를 때까지 많이 쏟아지지 않았다. 
  < 벌깨덩굴>


 
 정상에 거의 다가갈 무렵, 다른 일행을 만났다.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동지를 만나니 퍽 반가웠다. 
그래서 이젠 새로운 힘이 솟아났다.
 아직도 멀었을 거라고 생각하며 부지런히 걸었더니 뜻밖에도 정상이 눈앞에 
나타났다. 산 밑에서 산행을 시작한지 3시간 만이었다. 
정상치고는 허망할 만큼 평범했다. 
수도산 표지석이 없었더라면 정상이라고 믿어지지 않을만한 곳이었다. 
    < 풀솜나물 >

하마터면 중간에서 포기했을 뻔했는데 마침내 정상에 오르고 보니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이런 정신이라면 어떤 어려운 일인들 못할까! 
우린 해냈다.
  < 당개지치 >


 사진을 찍고 나서 올라왔던 길을 되짚어 내려갔다.


내려가는 길은 하나도 힘이 들지 않았다.
우리는 소풍가듯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산을 내려왔다.  (*)

출처 : 글나라
글쓴이 : 凡 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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