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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편지

凡草 2005. 9. 13. 21:01

 * 얼마 전에  좋은 글을 썼던 분의 다른 글입니다.
  가을 분위기에 맞는 글이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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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  편지
어디서 날아 왔는지 고추잠자리가 떼지어 날고 있었다. 
미경이는 실눈을 뜨고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청명하게 맑은 하늘에 구름조차도 보이지 않는다.
“진짜 가을인가벼.”
할머니가 했던 말을 미경이가 흉내내며 뱉었다.
“절대로 맨손으로 하면 안 된다. 알지? 눈 비벼도 안 되고.”
학교 가기 전에 엄마가 당부했던 말이다.
요즘은 한참 바쁜 농사철이라 미경이가 집안 일을 돕지 않으면 안 된다. 
식구들이 모두 들로 나가 가을걷이를 하느라 바쁘기 때문이다. 
미경이도 학교에서 돌아오면 마을 회관 앞에 널어놓은 고추를 한번 
휘이 저어 주어야 한다. 
그래야 골고루 잘 마른다. 행여 비라도 들치면 치워야 한다.  
미경이네 것만 하는 것이 아니다. 말리려고 내다 놓은 다른 집 고추도 
한 번쯤은 휘 저어 주어야 한다.  
 미경이네 마을에는 아이들이 많이 없다. 지난 봄 까지만 하더라도 순덕이, 
현영이, 미현이. 영호가 같은 학년 이었다. 
그런데  한 명씩 전학을 가고 말았다. 순덕이와 현영이는 읍내로 가버렸고  
미현이는 먼 도시로 이사를 갔다. 이제 남은 아이들이라고는 영호와 미경이 
뿐이었다. 하지만 미경이는 동네에서 영호를 보는 일이 적다. 영호는 
학교가 마치면 읍내 학원에 간다.  늦게 돌아오는 것 같았다. 
학교에서나 잠시 볼뿐이다.  동네에 남은 아이들은 미경이 보다 어린 
동생들 몇 뿐이다. 그러니 마을 사람들이 들에서 가을걷이를 하는 동안 
마을 회관 앞에 널어놓은 고추는 미경이 몫이 되고 말았다. 
 미경이는  외롭다고 느꼈다. 물론 학교에 가면 다른 친구들도 있다. 
하지만 그 친구들은 미경이와 같은 동네에 살지 않는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올 때 
갈림길에서 친구와 헤어지는 시간이 미경이는 제일 싫었다.  친구들은 안녕하고 
손 흔들고 다시 자기들끼리 재잘거리며 간다. 혼자 터벅터벅 걷다 돌부리를 
걷어차기도 하지만 심심하기는 매한가지다. 어떤 땐 목안에 뭐가 콱 막힌 듯하다. 
가슴이 답답하기도 하고.
그제는  미경이가 엄마에게 떼를 쓰며 말했다.
“엄마, 나도 학교 마치고 학원갈래요. 친구도 없고.”
“읍내까지 나가야 되잖아요.”
“영호는 매일 가는데 뭐.”
“영호야 엄마가 매일 차로 실어주지만 누가 널 데려다 주겠니?”
“영호 엄마한테 부탁하면 되잖아요.”
“그게 하루 이틀이지. 그렇게 되겠니? 또, 영호 엄마가 안 된다고 하면 
어쩔 건데?”
사실 영호 엄마는 이웃 아주머니들이랑 달랐다. 시골 사람처럼 보이지도 않았고 
멋쟁이였다. 영호 아버지가 농촌지도소에서 일하면서 이곳으로 이사를 오기는 
했지만 그리 오래 이곳에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영호는 좋겠다.’
무엇이 좋은지 미경이는 확실히 알지도 못하면서 어쨌거나 영호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경이도 이런 시골을  벗어나 도시로 이사가고 싶었다. 
텔레비전에서 보는 세련된 사람들, 풍족해 보이는 모습. 도시로 가면
미경이도 어쩐지 공부를 더 잘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또 전학간 친구들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전학간 친구를 못 만난다면 다른 새로운 친구들을 사귈 
기회도 많지 않을까? 예쁘게 머리를 기르고 친구들과 즐겁게 학교 가고 오는 
자신을 생각해 보았다.
“어림도 없어. 우리 엄마나 아빠가 이사 간다고 하실까? 매일 이렇게 땡볕에서 
농사만 짓고 검게 그을려서는.....”
미경이는 농사만 짓느라 그을린  엄마 아빠 얼굴도 싫었다. 농사를 짓지 않는 
다른 친구들 엄마는 학교에 오면 정말 희고 예뻐 보였다.  엄마가 화장을 하고 
오신다고 해도 어쩐지 미경이 눈에는 다른 엄마와는 달라 보였다. 그래서 다른 
아이들처럼 ‘엄마’ 하며 부르고 달려 가지 않았다.
가을햇살에 잘 말라가고 있는 고추들은 붉고 윤기났다. 
매케한 냄새가 코에 닿자
“에취”
하며 재채기를 해대었다. 연방 재채기를 하니 눈물까지 찔끔났다. 
야무진 가을햇살이 고추를 더 맵게 했나보다. 미경이는 입이 불퉁 나와서 
고추를 뒤집고 있었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고추 잠자리 무리가 떼를 지어 
날고 있었다.
‘이놈의 고추, 안 뒤집어도 그냥 혼자서 마르면 안 돼? 그리고 이놈의 잠자리야, 
너까지 왔다갔다 하니 정신이 없어. 왜 나를 귀찮게 하냐? ’
미경이가 마지못해 고추를 뒤적이고 있을 때 우체부 아저씨가 마을 회관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잖아도 너희 집에 가던 참인데 잘 됐다. 편지가 왔구나!”
미경이는 실장갑 낀 손을 털며 팔딱 일어났다. 우체부 아저씨는 예쁜 꽃 
봉투를 건냈다. 말끔한 글씨로 쓰여진 것은 단짝이었던 미현이였다. 미현이가 
이사를 가기 전에 둘이서  부둥켜안고 울기까지 했다. 미현이와 자매라고 해도 
될 만큼 둘은 붙어 다녔다.
“ 치, 도시로 가더니 꽃 봉투에다 편지를 쓸 줄 아네.”
매일 붙어 다니다 시피한 미현이라 말로는 다 통했어도 편지를 받아보기는 
처음이었다.
미경이는 얼른 집으로 달려와 가위부터 찾았다. 기쁜 마음에 그냥 편지를 
뜯어보아도 되겠지만  미현이가 보낸 예쁜 꽃 봉투를 손으로 죽 찢기가 
미안했다. 미경이는 가위로 봉투의 위를 살짝 잘랐다. 미현이 같이 깔끔하고 
예쁜 글씨가 안부를 묻고 있었다.
미경아, 
그동안 잘 있었지?
많이 보고 싶었어.
이곳에서 친구들을 많이 사귀었지만 그래도 네가 제일 보고 싶고 기억나.
지금쯤이면 동네에서는 벼를 벤다고 한창이겠구나. 벼뿐이겠니? 콩이며 깨도 
털어야 하고, 감따고 밤도 따야하고. 동네는 한참 분주하겠구나. 
어제는 공원에서 고추잠자리를 보았지 뭐니?
시골에서 보던 고추잠자리를 이곳에서 보니 무척 반갑더라. 또 그곳이 생각났어.
어쩌면 네가 소식을 전하려고 보낸 잠자리가 아닌가 싶어 한참을 따라 다녔어.
잡힐 듯 말 듯 앉았다 날아가는 잠자리를 보며 나도 훨훨 날아서 고향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어떤 땐 고향에 가고 싶어 눈물이 나기도 했어. 
나는 이곳에서 매우 바쁘게 지내고 있어. 버스를 타고 학교에 가야하고 
학교 마치면 학원도 가야해. 친구들도 바빠서 학교 마치고 함께 놀러 가는 일은 
거의 없어.  한번은 친구 생일이라 축하파티 하러 간 적이 있어. 
그런데 너무도 깔끔하고 잘 정돈된 집이라 혹시 내가 무얼 어지럽힐까봐 
조심스럽더라. 예전에 너의 집에서 감자도 삶아먹고 함께 자고 하던 일이 그리워. 
너의 집 부엌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도 잘 알았잖아.
미경아,
어제 네가 보내준 고추잠자리가 네가 나에게 보낸 편지라 생각하고 이 편지를 썼어.
고추잠자리가 다 못해준 말을 네가 해줘. 많이 보고 싶고 그리워. 
지금쯤이면 감이 빨갛게 익어 참 좋을텐데 말이야.
추석쯤이면 할머니 산소에 갈 수 있을지 몰라. 그럼 우리도 만날 수 있을 거야. 
그때 우리 꼭 만나자. 
그럼 안녕 친구야.
미경이는 편지를 미현이인양 꼬옥 안았다. 
미현이의 다정한 이야기가 들리는 듯하였다.  
미경이는 가슴이 부풀어 오르는 것 같았다. 
추석이면 미현이가 오는구나. 
미현이가 오면 전학 간 사이 생겼던 일들을 이야기 해 줘야겠다. 
미현이는 장갑을 끼는 것도 잊고 나머지 고추를 손으로 휘휘 뒤집고 있었다. 
에취 에취 연방 재채기를 해대었지만 재채기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휴, 이제 다했다.”
쪼그리고 앉아서 고추를 뒤집던 미경이가 허리를 펴고 일어섰다. 
이마에 맺혀있던 땀이 주루룩 흘러 내렸다.
미경이는 무심코 콧잔등을 닦고 말았다. 
“앗, 따거.”
고추를 만지던 매운 손이 코 아래를 쓸고 지나가자 따끔한 매운맛이 
피부로 스며들었다. 매운 맛에 눈물이 글썽 흘렀지만 미정이의 눈물은 
매운 눈물이 아니라 달콤한 눈물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