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5년 9월 25일 일요일 맑음 >
오늘은 산마루를 개간하는데 큰 도움을 주신 현선생님을 모시고
밀양 운정리로 갔다. 그 동안 날씨가 무덥더니 이젠 서늘한 기운이 느껴질 만큼
전형적인 가을 날씨였다.
날씨도 아주 맑아서 나들이 하기엔 참 좋은 날이었다.
아침 일찍 현선생님을 만나 밀양으로 향했다.
나는 차를 몰고 가면서도 심어 놓은 배추가 걱정되었다.
'혹시 배추벌레 때문에 배추가 엉망진창이 된 건 아닌지?'
이윽고 운정리에 도착해서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옷을 갈아입기가 무섭게 밭으로 가보니 배추가 몰라볼 만큼 많이 자라있었다.
비록 벌레가 많이 파먹긴 했지만 그 정도는 참아줄 만 했다.
나는 물뿌리개로 물을 주고 나서 어떤 녀석들이 배추를 파먹는지 살펴보았더니
배추잎을 갉아먹은 건 배추벌레가 아니라 메뚜기들이었다. 메뚜기들이 여기 저기서
폴짝 폴짝 날며 도망을 가는 것이 그 녀석들 짓인 것 같았다.
( 2주 전보다 많이 큰 배추 )

나는 농약을 사다 메뚜기와 배추벌레를 막고 싶었지만 참기로 했다. 다른 밭에서는
배추를 먹을 수가 없어서 우리 밭으로 오는데 여기서마저 농약으로 막으면 저 놈들은
어디서 먹고 살까?
나는 자연 효소를 만들어서 밭에 뿌리려고 항아리 안에 풀과 설탕을 버무려 두고
갔는데 오늘 항아리를 열어보니 국물이 하나도 생기지 않고 마른 잎들 그대로 있었다.
효소도 봄철이나 여름에 담아야 잘 되는 모양이다.
( 벌레가 적게 먹은 무잎 )

밭에 배추 모종을 옮겨 심으면서 무씨도 같이 뿌렸는데 무 잎은 생각보다 벌레가 적게
먹었다. 그럴 줄 알았으면 무를 더 많이 심는 건데. 아마 벌레들이 무보다는 배추를
더 좋아하는가 보다. 그렇다면 배추에 더 많은 농약을 칠 게 뻔하다.
사람들은 배추가 무보다 더 부드럽고 먹기 편하기 때문에 배추를 더 좋아한다.
무는 투박하고 거칠거칠하기 때문에 외면당하기 쉽지만 우리 몸의 건강에는 무가
더 좋을지 모른다.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다른 사람에 비해서 외모가 떨어지거나
경제력이 부족하더라도 마음씨나 태도로 보면 더 나을 수도 있을 것이다.
농약을 많이 치고도 겉보기에는 좋아서 대우받는 배추. 보기에는 수수해도 농약을
적게 쳐서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무. 배추같은 사람보다는 무같은 사람을 더
가까이해야 하지 않을는지.
현선생님이 도와준 덕분에 뒷마당의 대나무도 정리가 되고 마당의 풀도 깨끗하게
단장되었다.
현선생님이 베어낸 대나무 줄기에서 댓잎을 땄다. 그 댓잎을 주전자에 넣고 물을 부어
끓였더니 댓잎차가 되었다. 그런 대로 마실만 했다.
시골에 오면 땅은 나에게 뭔가 늘 선물을 준다. 절대로 빈 손으로 보내는 법이 없다.
오늘도 호박 한 개, 감 약간, 가지 몇 개, 호박잎, 생수 한 통, 댓잎차, 맑은 물, 맑은
공기......
( 밭가에 돋아난 털진득찰 )

땅은 어머니의 품처럼 넉넉하다.
나는 오늘도 시골에 와서 아무 하는 일없이 빈둥거리다 하루를 보내고 부산으로
돌아가지만 마음만은 무척 푸근하다. 어머니를 만나 인사를 하듯 땅에 엎드려 채소를
들여다보았고, 어머니의 흰머리 같은 잡초를 뽑았다. 어찌 이런 일을 시시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부산 해운대에서 밀양 운정리까지 차를 타고 와서 채소를 돌보자면 채소값보다
기름값이 더 들지만 이것은 돈으로 따질 수 없다고 본다. 경제적으로는 손해지만
정신적으로는 몇 배의 이익을 보는 셈이니까.
이와같이 세상을 살다보면 꼭 돈으로 따져서 계산할 수 없는 일이 많을 것이다.
나는 밀양에 왔다 가며 경제적인 논리를 배우는 대신에 자연의 논리를 새로 배우고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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