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8년 2월 3일 일요일 맑음 >
흰눈썹 같은 산
동화지기들과 덕유산에 갔던 일이 퍽 인상 깊어서
기회가 되면 아내와 한 번 눈이 많은 산에 가고
싶었다.
마침 아내 생일이 어제라 생일 축하도 할겸 눈이 많은
산을 찾아가기로 했다.
부산에서 눈을 기다려봐야 일년에 한 두 번이 고작이니
직접 찾아가는 수밖에 없다.
겨울에 눈이 많은 산은 덕유산, 태백산, 소백산, 운장산,
한라산 등이 손꼽히는데, 신문에서 등산 일정을 검색하여
소백산 설경을 선택하였다.
출발은 서면에서 8시 10분. 청파 산악회를 따라가게 되었다.
아침 6시 10분에 일어나 배낭을 꾸리고 아침 식사를 간단히
한 다음에 지하철을 타고 서면으로 갔다.
약속 장소에 도착하여 차를 기다렸더니 산악회 버스가 왔다.
아내와 함께 차에 올랐더니 우리가 앉을 자리에 이름표까지
붙여 놓았다.
저번에 동화지기들과 갈 때는 산악회 간부에게 두 명이
나중에 탈 테니 어느 좌석인지 알아달라고 했더니, 그 사람
대답은 이랬다.
"그런 거 우리보고 일일이 물어보지 말고 저 앞에 가면
좌석 배치표가 있으니 직접 가서 확인해요. 이거 남는 장사도
아닌데 일일이 물어보면 힘들어요."
알고 보니 그 사람은 회장이었다. 한 단체를 이끄는 회장이
그런 정도의 서비스 정신을 갖고 있어서 놀랐는데, 오늘은
준비가 완벽했고 무척 친절했다.
1인당 경비도 2만 원만 받아서 장삿속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회장과 산행대장의 인삿말도 깔끔하고 군더더기가 없어서
마음에 들었다.
출발부터 기분이 좋으니 오늘 산행도 잘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차는 신대구 고속도로를 거쳐 중앙고속도로를 달려 풍기로
빠져 나가 영주시 풍기읍 삼가리에 도착했다.
산행 들머리는 삼가리. 산행 코스는 삼가리-비로사 입구-
비로봉(1439미터)-주목감시 초소-천동골-천동야영장- 다리안
국민관광지까지 가는데 예정 시간은 대략 4시간 30분이었다.

삼가리에서 내리자 산행이 시작되었다. 오늘 참가 인원은
46명.
멀리서 바라보니 소백산 정상이 하얀 눈썹처럼 보였다.
다른 곳은 희끗희끗한데 유독 정상 부분만 하얗게 보이는
것을 보니 거기엔 눈이 듬뿍 쌓여 있는 모양이다.
겨울철 내내 하얀 눈꽃을 머리에 이고 있다고 해서 소백산
이라는 이름이 붙어다고 하는데 직접 보니 실감이 났다.
동화지기들과 덕유산에 갔을 때는 산행 경험이 부족한 회원들이
있어서 속도를 내지 못했지만 오늘은 선두에 서서 걷기로 했다.
내 체력을 모처럼 시험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아내도 등산을 처음 시작했을 때는 통 걷기를 싫어했다.
금정산에도 차를 갖고 가서 겨우 30분 정도 걷다가 그냥
내려올 정도였다.
그런 아내를 산에 데리고 가자니 처음엔 몹시 힘들었다.
30분 걷는 정도에서 1시간 걷기까지 몇 달이 걸렸는데,
산에 안 따라 가려는 아내에게 돈을 준다, 외식을 시켜주겠다,
저녁 설거지는 내가 하겠다, 온갖 경품을 내걸고 꾄 덕분에
차차 시간이 늘어서 3-4시간을 무리없이 걷게 되었다.
그렇게 10년 이상을 하고 나니 때로는 6-7시간이나 걸리는
산행도 큰 부담없이 소화해 내었다.
이젠 산행 경력이 약 15년 정도.
처음 몇 년 동안에는 등산 일지를 적지 않았는데 그것까지
다 합치면 400회는 벌써 넘었을 것이다.

글을 쓰든 집안 일을 하든 체력은 가장 중요한 밑바탕이다.
여태 아내는 큰 병 없이 살아왔다. 병원에 입원한 적 없고
몸살 감기도 가볍게 넘겼다.
최근에 와서 오십견도 하고 대상 포진으로 몇 달 고생했지만
이젠 정상적인 체력을 되찾았다.
아내는 나를 따라다니다 보니 산에 푹 빠진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나는 정말 산을 좋아한다.
비가 오는 날도 산에 가야 직성이 풀리고 태풍 부는 날도 몸이
날아갈 정도가 아니면 산에 간다.
비가 오는 날에 우산이나 비옷을 입고 산에 오르면 토독톡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감미로운 음악처럼 들린다.
그처럼 산을 좋아하는 내가 산에 안 갈 때는 노루실에 있을 때
뿐이다. 부산에 있을 때는 산에 가지 않으면 몸살이 날 지경인데
노루실에 가면 그런 마음이 사라지니 참 이상하다.

오늘 산행은 청파 산악회 뿐만 아니라 한뫼 산악회, 울산 문무
산악회, 구리 산악회, 사파리 등산클럽 등... 전국에서 모여든
많은 산악회로 북적거렸다.
줄지어 걸어가는 일을 피하기 위해 나는 처음부터 속도를 내었다.
한참 부지런히 앞질러 갔더니 아내가 열심히 따라오고 있었다.
잠시 기다렸다가 아내를 내 앞에 가도록 했다. 아내는 비탈길도
계단길도 척척 잘 올랐다. 천천히 걸어가는 남자들을 다 따라내는
것을 보니 흐뭇했다.
나와 여태 산에 같이 다닌 보람이 있구나 싶었다.

눈이 점점 많아지면서 산길은 점점 가팔라졌다. 이 산에도
꽤 많은 눈이 쌓여 있었다.
중간에서 한 번 쉬고는 곧장 비로봉까지 치고 올라갔다.
1400미터가 넘으니 제법 가파른 길이었지만 이 정도는 우리에게
별 무리가 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깎아지른 오르막길이라며 힘들다고 했는데 우리는
숨을 크게 헐떡이지도 않고 가뿐하게 올라갔다.
우리가 비로봉에 올라보니 청파 산악회원은 한 사람 정도밖에
보이지 않았다.
주목 군락 감시 초소를 열어 놓아서 그 안에 들어가 점심을
먹었다.
밖은 추웠지만 실내는 훈훈했다.
점심을 먹고 능선길로 나오니 아주 찬 바람이 불어왔다.
올라갈 때까지는 그다지 춥지 않아서 장갑을 한 켤레만 끼고
있었는데 손이 시렸다. 부랴부랴 두터운 장갑을 더 꼈는데도
손가락이 굳어서 감각이 없었다.
말라죽은 주목도 있고 눈풍경도 굉장히 멋졌는데 손가락이
얼어 붙으니 사진 찍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서둘러 하산을 시작했다.
오늘 산행의 단점은 덕유산만큼 능선을 충분히 밟을 수 없는
점이었다. 정상에 오르고 나서 얼마 걷지 않았는데 계곡
아래로 내려가는 코스였다.
그 대신 곤돌라를 타지는 않아서 내리막길이 매우 길었다.


천동골 쪽으로 한참 내려왔더니 그제야 손가락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비로봉에서 목적지인 다리안 국민관광지까지 6.8킬로미터이니
출발했던 삼가리부터 치면 대충 12킬로미터 정도는 걸을 것
같다.
내려오는 천동골은 끝까지 눈길이었다. 덕유산 종주 능선만큼
눈이 많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아이젠 없이는 걷기가 힘든 눈길
이었다.
스패츠와 아이젠을 차고 걸을 수 있는 눈길이 그리 흔한가?


손가락이 풀리면서 여유를 되찾아 사진도 찍으면서 내려왔다.
어떤 사람들은 미리 비닐 깔개를 준비해와서 눈썰매처럼 내려
가기도 했다. 우리도 이런 완만한 내리막길인 줄 알았다면
비닐깔개를 준비해왔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천동골은 쭉쭉 뻗은 잣나무 숲이 울창하여 경치가 퍽 좋았다.
앞서 걸어가는 아내를 보니 마치 영화 속의 한 장면 같았다. 

다리안 국민관광지 앞에 도착하니 3시 25분경. 출발 시각이
11시 20분이니 4시간 정도 걸린 셈이다. 예정 시간보다 30분을
앞당겼다.
거의 선두에 서서 걸었는데도 다리는 별로 아프지 않았다.
버스를 찾아 들어가서 앉았더니 그제야 긴장이 풀리면서
몸이 나른해졌다. 선두를 지키느라 애를 쓴데다 추위 속에서
떨은 탓일게다.
잠시 쉬고 있는데 산악회에서 준비한 술과 오뎅을 먹으라고
불렀다. 막걸리와 오뎅을 먹고 나니 몸이 풀리고 기운이 회복
되었다.


이제 돌아오는 길.
차는 다시 부산으로 달린다.
아내도 모처럼 눈을 실컷 밟아서 좋아했다.
오늘이 294차 산행이다.
다른 회원들도 초보라면 내 아내가 그랬듯이 처음에는 1시간부터
시작하여 꾸준히 하기 바란다. 지금부터 가벼운 산행이라도
수첩에 적어 나가면 언젠가는 500회 이상도 될 것이다.
건강보다 더 좋은 재산은 없다. 등산을 오래 해보면 알 것이다.
어떤 약보다 더 좋은 명약이 산에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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