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이야기

[스크랩] 음치 아빠, 노래하는 딸 (504회)

凡草 2013. 4. 5. 22:58

 

<504회>

 

음치 아빠, 노래하는 딸

 

< 2013년 4월 4일, 금요일, 맑음 >

 

 네 살 때인가 엄마가 빨래할 때 쓰려고 마루 위에 얹어둔

양잿물을 마신 적이 있었다. 병에 양잿물을 담아두었던 모양인데

어렸을 때라 음료수인 줄 알고 마셨던 것이다.

 하마터면 죽을 뻔 했는데 때마침 누나가 학교에서 돌아와 양잿물과

식초가 상극이라고 알려줘서 급히 식초를 마신 덕분에 살아났다.

그때 성대를 상했는지 어쨌는지 자라면서 노래를 불러도 고음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음악 시간을 좋아하지 않았고, 노래 부르는 것을 멀리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음치가 되어버렸다.

 

 

 그래도 보통 때는 별로 불편한 줄을 몰랐는데 부산교육대학교를

지원하면서 애를 먹었다.

 법대를 가려고 했다가 가정형편 때문에 진로를 바꾸다 보니 준비가 전혀

안 된 상태에서 실기 시험을 보아야만 했다.

 성악을 맡았던 고택국 교수는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피아노로

계이름을 치시더니 불러보라고 하셨다. 혼자 있는 곳에서 해도 잘할까

말까 한데 수많은 수험생이 보는 앞에서 해보라고 하니 더 안 되었다.

 얼굴은 벌겋게 달아오르고 고음 처리가 안 되는 목은 아예 잠겨버렸다.

몇 번 해도 안 되자 교수님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네 음치인가?’하고

물었다. 내가 아니라고 하자 낮은 도부터 높은 도까지 차례로 불러보라고

하셨다. 그것마저 고음 처리가 안 되니까 한참 망설이다가 뭐라고 채점을

하셨다.

 결국 교육대학 시험에 합격되긴 했지만 가슴 졸인 순간이었다.

대학교에 다닐 때도 음악 실기 시험은 항상 펑크가 났고 재시험을 보고

겨우 낙제를 면하곤 했다.

 

 

 교육대학교를 졸업하여 교사가 된 뒤로 제일 힘든 때는 음악시간이었다.

내가 교사를 할 당시는 음악 전담 교사가 없어서 내가 전과목을 다

가르쳐야만 했다.

 다른 과목은 아무 문제가 없는데 음악 시간이 되면 죄를 짓는 기분이었다.

가창을 가르치기가 힘들었고, 피아노도 잘 치지 못해서 올림표와 내림표가

세 개 이상 붙은 것은 더듬더듬 쳐서 아이들에게 웃음거리가 되었다.

할 수 없이 노래는 잘 하는 아이를 불러내어 부르게 하고 나는 지휘만 했다.

피아노도 나보다 잘 치는 아이가 있으면 어려운 곡은 연주를 맡기기도 했다.

나는 자신이 없는 음악을 잘 가르치지 못하는 대신 국어와 다른 과목에서

빚을 갚으려고 최선을 다했다. 다른 선생님들은 정해진 퇴근 시각에 맞추어

학교를 나갔지만 나는 30분이나 한 시간 이상 학교에 남아서 더 일을 하곤

했다.

 그런 나를 보고 교장 선생님은 ‘우리 학교의 보물 같은 선생님’이라고

칭찬하기도 했다.

 

 

 학교에서 근무할 때 또 난처했던 경우는 선생님들이 모처럼 회식을 하고

나서 노래방에 가는 날이었다. 나는 노래 부르기가 싫어서 도살장에 끌려가는

기분이 되었다. 기회만 노리다가 처음부터 달아나기도 했고, 어쩔 수 없이

끌려가게 되면 잔뜩 긴장하고 있다가 간신히 한 두 곡을 부르고는 빠져 나와

버렸다.

 

 한 번은 아동문학회에서 큰 행사를 마치고 노래방에 간 일이 있었다.

나는 내 차례가 되기 전에 초조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화장실에 가서

조금 있다가 불러야 할 노래를 속으로 중얼중얼 외우고 있었는데, 그걸

백영현씨가 보고는 배꼽을 잡고 웃었다.

 “하이고 여기서 뭐합니까? 화장실에서 노래 연습하는 사람은 처음 보네요.”

백영현씨는 노래를 잘하기 때문에 내 심정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노래와는 담을 쌓고 살아왔는데, 차츰 나이를 먹다보니 못하면 못하는

대로 적당히 고음 처리를 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어 지금은 노래방에 가더라도

그렇게 두렵지는 않다.

 

 

 나는 이처럼 노래를 못하지만 막내딸 봉현이는 지금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대학에서 패션디자인을 전공하고도 전혀 다른 분야에서 일하고 있다.

 요즘에는 ‘문 센트(달의 향기)’라는 밴드에서 싱어로 활동 중인데 대학 축제나

여러 행사에 참석하여 노래를 부른다.

 나는 노래를 잘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무대 공포증까지 있는데 딸은 수많은

군중 앞에서도 태연하게 노래를 부른다.

 나는 그런 딸이 자랑스럽다. 나는 집안 형편 때문에 대학이나 내 진로를

마음대로 선택할 수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딸은 어떤 길을 가건 스스로

선택하도록 간섭하지 않고 지켜보기만 했다.

 딸은 어쩌면 내 어머니를 닮았는지 모르겠다. 어머니가 국악을 아주

좋아하셨으니까.

 

 

 며칠 전에 봉현이가 북구 빙상센터 공연장에서 공연을 한다고 해서

아내와 시간을 내어 보러 갔다.

 딸이 공연하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가까운 곳에 왔을 때

한 번 보고 싶었다.

 딸은 ‘제 3회 설수진의 문화콘서트 아름답게’라는 공연에 출연하였다.

아름답게는 ‘아픈 시름 해답을 줄 수 있게’라는 말을 줄인 것인데

화상 환자들을 돕기 위한 자선행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른 공연이 지나가고 딸의 차례가 되었다.

문 센트가 나오자 내가 마치 노래를 하는 것처럼 떨렸다.

나는 딸이 실수라도 할까 봐 무척 긴장이 되었는데 딸은 생각보다

능숙하게 잘 했다.

노래 부르는 솜씨도 그전보다 기량이 더 늘어서 이젠 거의 프로급

솜씨였다.

성량이 풍부하고 테크닉도 뛰어나서 자기 관리만 잘하면 어디를 가나

인정받을 것 같았다.

 

 

 

 

 처음에는 긴장이 되었는데 딸이 노래를 잘 부르자 마음이 편해졌다.

세 곡을 다 듣고 남들보다 더 큰 박수를 보내주었다.

 ‘봉현아 잘 한다! 앞으로 더 노력해서 네 꿈을 펼쳐라!’

 나는 비록 음치였지만, 딸의 시원시원한 노래를 들으니 십 년 묵은

체증이 싹 내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공연을 다 마치고 딸과 함께 집으로 돌아와 맥주를 마셨다.

 그 어느 날보다 달콤한 맛이었다. (*)

출처 : 글나라
글쓴이 : 凡 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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