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범초산장 일기; 550회 >
아무 것도 없다고 없는 것이 아냐
< 2013년 12월 27일, 금요일, 맑음 >
한 해가 다 저물어가고 있다. 글을 열심히 써서 신춘문예에 응모한 제자들은 아무리 기다려도 소식이 없으니 애가 탄다. “선생님, 좋은 소식 오면 전화드릴 게요.” 이렇게 웃으며 말한 제자가 결국은 당선 전화를 받지 못했다. 아마 힘이 빠질 것이다. 하지만 낙방했다고 아무 것도 못한 것은 아니다. 여태 쏟은 노력은 분명히 자신 안에 숨어 있다. 다만 몇 퍼센트가 부족했을 뿐 전체가 다 잘못된 것은 아니다. 사과에 작은 흠집이 있다고 그 사과 전부를 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일부만 도려내고 먹을 수 있듯이 우리들의 인생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올해 다 이루지 못한 일은 내년에 다시 이루도록 도전해야 한다. 즐기면서 계속 도전하다 보면 정상에 오르는 날이 있을 것이다.
내가 요즘 읽은 ‘매력’ (김모란 지음, RHK 발행)이란 책에 이런 말이 있다. ‘시간이란 무심코 흐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같은 시간이라도 얼마나 밀도 높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타인보다 몇 배 길어질 수 있다.’ 이걸 실감한 날이 있다.
크리스마스였던 25일 오전에 아내와 함께 서면 부전시장으로 나무 난로를 사러 갔다. 산장에 이미 설치한 난로가 화력도 약하고 연기가 많이 나서 도저히 그대로 쓸 수가 없었다. 실내에 연기가 뿌옇게 차니 건강에도 해로울 것 같았다. 동그라미 계원인 이홍식씨가 성의껏 만들어주어서 고맙긴 하지만 역시 난로는 난로 전문회사에서 만든 걸 쓰는 게 옳았다. 부전역 부근에 가니 나무 난로 파는 곳이 많았다. 25평-30평형 난로 가격을 물어보니 18만원이라고 해서 17만원 주고 샀다. 산장으로 가져와 아내와 함께 난로를 설치하고 불을 피워 보았더니 화력도 세고 연기도 거의 세지 않았다. 이 난로에는 고구마 굽는 포켓도 둘이나 붙어 있어서 편리했다. 돈은 들었지만 난로를 새로 설치하고 나니 해묵은 숙제를 해결한 느낌이 들었다. 이 난로를 놓기까지는 도라지집 아주머니의 조언이 큰 도움이 되었다. 아주머니는 먼저 난로를 써본 경험을 토대로 몇 가지 조언을 해주었다. 그 중 하나가 난로 안에 내화 벽돌을 몇 개 넣어두면 불이 오래 가고 나무도 적게 든다고 했다. 그 조언을 받아들여 우리 난로에도 벽돌을 넉장 넣었다.
라면을 끓여 먹고 고구마도 구워 먹은 뒤에 계곡으로 들어가서 작은 못을 팠다. 여름에 발 담그고 놀 수 있는 작은 연못을 만들기 위해서 였다. 산장 옆에 있는 계곡물은 겨울에도 마르지 않아서 좋다.
그런 다음에 기장 바닷가로 갔다. 난로 위에 얹어서 뜨겁게 달구어 찜질용으로 쓸 조약돌을 주울 겸 바닷바람을 쐬려고 죽성 바닷가 앞에 차를 세웠다. 여태 못 본 영화 촬영장 세트가 있어서 둘러보며 바닷가를 한 바퀴 돌았다.
등대를 보고 드넓은 바다도 보니 가슴이 탁 트였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절도 구경했다. 숨어 있는 절이었는데 우연히 발견하고 들어가서 둘러보았다. 작은 보물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바닷가 식당에서 굴구이와 함께 이른 저녁 식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와 크리스마스 파티를 했다. 아이스크림 케익을 먹으면서 ‘마리포사’라는 영화 한 편을 보았는데도 아직 9시반 밖에 되지 않았다.
그날은 시간이 참 마디게 느릿느릿 흘러갔다. 여러 가지 일을 했는데도 시간이 천천히 지나갔다. 아마 밀도 있게 썼기 때문인가 보다.
지난 23일에는 양산 영축산으로 등산을 갔다. 지산리에서 등산을 시작했는데 눈 한 점 볼 수 없고 말짱했다. 마른 낙엽만 볼 수 있었다. 마른 낙엽 위에 내가 서니 나 역시 낙엽으로 가득 찬 몸이었다. 나와 낙엽이 다를 바가 없었다. 살아 있을 때가 사람이지 숨이 끊어지면 낙엽이 되는구나.
산위에서 내려다보니 도시가 뿌옇게 잠겨 있었다. 저렇게 혼탁한 세상에서 내가 잘 났다, 너는 어떻다고 해본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진흙탕 속에서 아귀다툼을 하는 것과 같다. 잠시라도 저 세상을 빠져 나와 맑은 산 위에 서 있는 것이 행복했다. 다시 그곳으로 들어갈망정. 정상에 점점 가까워질수록 눈이 보이기 시작했다.
산 아래는 눈이 없어도 여기는 있었다. 거기 아무 것도 없다고 없는 것이 아니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 눈이 엄청 많이 쌓여 있다. 올 겨울에 두 번째 밟아보는 눈이다. 봄이 되기 전에 눈길 산행을 열 번은 하고 싶은데 잘 될지 모르겠다. 연방 땀을 흘리고 손수건으로 닦으면서 한 발 한 발 오른 끝에 마침내 정상에 닿았다. 정상에 닿기는 정말 쉽지 않다. 포기하면 영영 볼 수 없다. 힘은 들었어도 보람은 크다. 누가 상 주는 거 아니지만 자신감 백배다. 내가 나에게 주는 건강 확인증을 받고 아래로 내려왔다.
호주 시드니에 머물고 있는 이정환씨가 사진을 보냈다. 거기는 아직 여름인데 크리스마스를 맞아 성당벽에 레이저쇼를 한 사진이었다. 한우리 문학상을 받은 뒤에 아들 집에 가서 쉬고 있는 이정환씨가 종종 연락을 줘서 감사하다. 내년 봄에 돌아온다니 글감 많이 얻고 건강하게 있다가 오시길 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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