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초산장 일기 615회)
2014년 12월 28일, 일요일, 맑음
국제시장과 가장의 짐
영화 <국제시장>이 참 좋다고 해서 오늘 낮에 보고 왔다.
황정민이 주인공을 맡은 이 영화는 흥남부두 철수 사건을 시작으로 부산 피난민 시절, 독일로 광부를 보낸 일, 월남에 국군을 보낸 일에다 이산가족 상봉 행사 등 굵직굵직한 역사적 사건들을 날줄로 이어가며 자잘한 에피소드를 씨줄로 엮어 짠 이야기였다.
이 영화를 보니 내가 보낸 어린 시절이 되살아났다. 서울에서 어렵게 살다가 도저히 먹고 살 길이 없어 엄마는 세 아들을 데리고 부산으로 내려왔다. 그때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으로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어머니에게 도리어 짐만 되었다. 집안 생계는 어머니가 혼자 꾸려갔는데 구멍가게도 하고 행상도 하고 온갖 궂은 일을 하면서 다섯 식구를 먹여 살렸다.
그 당시 부산에는 어머니의 외사촌 동생이 경찰을 하고 있어서 혹시나 도움을 받을까 하고 이사온 것이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믿었던 외사촌 동생도 푼돈만 가끔 손에 쥐어 주었을 뿐 큰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그 바람에 어머니는 달걀 행상, 노점상, 부두에서 구멍가게 등 안 해본 일이 없었다. 두 형님도 학교 대신 일찍 생업 전선에 뛰어들어 엿장사, 아르바이트, 품팔이 등을 전전하다 큰형님은 운전기사로 가장의 자리를 대신했고, 둘째 형님은 이발소에 취직하여 이발 기술을 배워서 먹고 살았다.
영화에 나온 윤덕수는 그래도 국제시장에 버젓한 가게라도 있었으니 우리보다는 먹고 살기가 나았을 것이다.
우리집은 아미동 산비탈에 있었는데 조금만 걸어가면 국제시장이 있었다. 우리는 배급 받은 밀가루로 수제비도 끓여 먹고, 옥수수 가루로는 옥수수죽을 해 먹었다. 그야 말로 하루 하루 입에 풀칠하기가 전쟁과도 같았다.
나는 어머니를 따라 국제시장에 물건을 떼러 가기도 했고 학창 시절에는 국제시장을 지나서 학교까지 6년 동안이나 걸어 다녔다. 통학 거리가 지금으로 말하면 6-7개의 버스 정류소를 지날만큼 먼 거리였으니 요즘 학생들 같으면 상상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돈이 없으니 불평 한 마디 안 하고 걸어다녔다. 당시에는 급식이 없어서 알루미늄 도시락을 천에 싸서 책가방에 넣어 다녔는데, 김치 국물이 새어서 교과서가 젖어 김치 냄새가 나기도 했다. 그래도 김치뿐인 밥을 싸가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었다. 사춘기 시절에 어머니 대신 과자랑 짐보따리를 들고 국제시장에 다녀올 때 여학생을 만나면 참 부끄러웠다.
지금은 흔해빠진 달걀이 그 때는 부잣집 아이만 싸오는 고급 반찬이었으니 그 시절 어려운 사정을 어떻게 말로 다 설명하겠는가? 거기에 비하면 내 아이들은 부잣집 아이들처럼 자라서 이런 사정을 전혀 모르고 아버지가 구두쇠라고 놀리거나 걸핏하면 옛날 이야기를 한다고 흉본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정규 인문 고등학교를 못 가고 장학금을 주는 실업계 학교를 졸업했기 때문에 첫 번째 대학입시에서는 실패하고, 초등학생들을 가르치며 혼자 재수를 한 끝에 부산대학교 국문과에 필답고사는 합격했지만 신체검사 결과 폐결핵으로 판정이 나서 합격이 취소되었다. 그때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었다. 아마 몸이 건강해서 합격이 되었다고 해도 등록금이 없어서 힘들었을 것이다. 3수를 하는 동안 돈이 없어 폐결핵을 제대로 치료하지 못했기 때문에 신체검사가 있는 부산대는 지원을 못하고 신체검사가 없는 교육대학으로 진로를 돌렸다. 그래서 내 인생 진로가 확 바뀌어 버렸다.
다행히 부산교육대학에 합격하여 들어갔는데, 하사관후보생 교육을 받기 위해 지원했지만 문제는 또 신체검사가 가로막고 있었다. 만약에 내가 정상적인 가정에 있었다면 건강부터 먼저 보살피고, 군대를 늦게 가더라도 힘든 하사관 교육을 받지 않았을 텐데 그 당시에 나는 절박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누나가 결혼에 실패하여 어린 두 조카를 큰형님 집에 맡겨 놓고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10평밖에 안 되는 좁은 시영아파트에서 큰형님 부부에다 나와 엄마, 조카 둘- 모두 여섯 식구가 살았다. 그러다 보니 형수가 조카들에게 싫은 소리를 자주 했고, 어머니가 맞서다 보니 집안 공기가 좋지 않았다. 그걸 옆에서 보던 나는 어떻게든 빨리 취업을 해서 돈을 벌어 어머니와 조카 둘을 먹여 살려야겠다고 다짐했다. 영화 속의 윤덕수처럼 나도 가장으로서의 큰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사정 때문에 건강이 안 좋았지만 무리할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불법이지만, 나는 신체검사를 하기 전에 몸이 건강한 친구에게 나 대신 가슴 사진을 찍어 달라고 부탁했고, 그 친구는 별로 친하지도 않았는데 선선히 응해주어서 간신히 신체검사를 통과했다.
그 뒤 학교 수업을 받으며 일주일에 7시간씩 고된 군사훈련을 받는데 약한 내 몸으로는 엄청나게 힘들었다. 그러면서도 학교 수업이 끝나면 가정교사 노릇을 하러 가서 돈을 벌어야만 했다. 내 교육대학 시절에는 미팅이나 낭만은 생각해보지도 못했고, 그런 호사는커녕 마음 놓고 쉴 수 있는 시간조차 드물었다. 내가 군인인지 학생인지 분간조차 되지 않았다. 나와 친하게 지내던 종호라는 마음 약한 친구는 힘든 군사훈련을 받다가 정신분열증에 걸려 학교도 그만 두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기도 했다. 나는 이를 악물고 악착같이 버티었다.
그렇게 2년을 근근히 버틴 뒤에 학교로 발령을 받았지만, 악착같이 버티던 몸이 끝내는 감당하지 못하고 무너져버렸다.
결핵을 체계적으로 치료받지 못하고 구호재단에서 대충 주는 약을 한 움큼씩 오래 먹은데다, 햇병아리 교사로 여러 가지 학교 업무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보니 위궤양으로 서서히 나빠져 갔고, 급기야는 위천공으로 인한 복막염으로 번졌다.
나는 한밤중에 배가 끊어지는 아픔을 느끼며 응급차에 실려가서 위절제 수술을 받았다. 그러고도 나는 며칠 만에 퇴원하여 바로 교단에 섰다.
어디 그뿐인가? 태어날 때부터 심실중격결손증이라는 심장 장애가 있었지만 돈이 없어 수술을 받지 못하다가 공무원 의료보험이 생긴 뒤에야 32살에 뒤늦게 수술을 받았다. 가슴 뼈를 절개하고 심장 수술을 받았는데, 학생들 수업에 지장이 없도록 서울대학병원에 부탁하여 특별히 방학 중에 수술을 받았고, 보름만에 퇴원하자 마자 곧장 학교에 나갔는데 교직원들이 모두 놀랐다. 아픈 몸으로 어떻게 나왔느냐고. 나는 가슴빼가 덜 아물어서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인 채로 조심조심 걸어다니면서도 결근 한 번 하지 않았다. 정신력만 강하면 어떠한 고난도 다 이겨낼 수 있었다.
그렇게 건강 문제로 내내 고생했지만 나는 아버지처럼 무능력한 가장이 되지는 않아야겠다는 각오로 열심히 일해서 가정을 지켰고, 비실비실하던 몸도 남보다 몇 배 더 노력하여 튼튼하게 만들었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병약했지만 두 형님은 레슬러처럼 건장한 체구였는데 큰형님은 술을 좋아하다 간암으로 돌아가셨고, 둘째 형님도 큰형님처럼 술을 많이 마시다가 요즘에는 무릎이 아파 고생하고 있지만, 나는 아직 건강한 편이다.
내가 이렇게 건강한 몸이 되기까지는 가장이라는 짐을 지고 앞만 보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비록 힘은 들었지만 나도 건강해질 수 있었으니 그 무거운 가장의 짐이 마냥 나를 힘들게 했던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금도 가족이 없다면 도시 생활을 훌훌 털어버리고 자연인처럼 산속으로 들어가 살고 싶지만 가족이 있으니 그러지 못하고 있다. 가족이 한 편으로는 굴레라고 볼 수도 있으나, 다른 시각으로 보면 나이 든 내가 산에 들어가 살면 큰 고생을 할 수 있으니 오히려 가족 덕분에 편안한 도시에서 살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등산할 때 등에 메는 무거운 배낭이 힘들기는 해도 위급 상황에서는 척추와 머리를 보호해주는 받침대 역할을 해주고, 추운 겨울에는 체온을 보호해주기도 하듯이 가장이 지고 있는 짐도 그러할 것이다.
아무튼 <국제시장> 영화를 보고 지나간 날을 돌이켜볼 수 있어서 좋았고, 그 힘든 세월을 무사히 보냈다는 점에서 큰 감사를 하고 싶다. 진작 죽었어야 할 내가 아직도 건강하게 살아있는 것을 보면 가장이라는 자리가 불로초보다도 더 효험이 있는 모양이다. 나는 죽을 때까지 가장 자리를 섣불리 벗어던지지 않을 생각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젊은 시절에 건강하지 못해 큰 고생을 했기 때문에 나는 늘 건강에 신경을 쓰고 있다. 따로 보약은 안 먹지만 하루 세끼 먹는 밥은 남다르게 해먹는다.
가능하면 식당에 안 가고 내가 직접 해 먹는데 현미쌀에 쥐눈이콩, 팥, 율무 등을 기본적으로 반드시 넣고, 계절에 따라 뽕잎이나 약초, 버섯, 고구마, 은행, 토란, 미역귀다리, 밤 등을 돌아가며 넣는다.
밥에 붓는 물은 그냥 물이 아니라 오늘은 차조기 달인 물, 다른 날은 당귀 달인 물, 뽕잎 끓인 물, 오가피물 등... 물도 남과는 다른 물을 쓴다. 왜 이렇게 하는가? 밥은 싫든 좋든 하루에 세끼를 꼬박꼬박 먹으니 밥만 잘 먹어도 건강을 지킬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나이가 제법 들었지만 아직도 눈이 좋은 편이다. 나는 이런 일을 전혀 힘들게 생각하지 않고 오락처럼 즐겁게 한다. 오늘은 어떤 것을 넣을까? 생각하면 식사 시간이 은근히 기다려진다.
이렇게 밥을 하면 그냥 밥이 아니라 거의 보약 수준이다. 반찬은 생선을 곁들이지만 아무 반찬이 없어도 싱겁지 않고 맛이 있다. 이런 밥을 먹을 때마다 행복하고 건강하게 살아 있는 것이 감사하다.
그 외에 내 건강 비법을 보면,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오일플링, 맨손체조하기, 발목펌프 운동, 발끝치기, 아침 먹기 전에 사과 하나 먹기, 물은 식사 시간 1시간 전후에는 안 마시기, 식간에는 효소를 약초 물에 타서 자주 마시기, 매주 1회 이상 등산하기, 주말에는 산장에 가서 지내기, 식사하고 나면 뽕잎 가루 한 숟가락 먹기, 어떤 일이 있더라도 밤 12시 전에는 잠자리에 들기, 밤새우지 않기, 담배는 아예 안 피우고 술은 막걸리 한 병 이상 마시지 않기, 늘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등이다.
이처럼 건강에 신경을 쓰지만 원숭이가 나무에서 떨어진다고 나도 자전거를 타고 가다 실수로 넘어져서 이마와 얼굴을 다쳤다. 찐빵을 이마에 올려 놓은 것처럼 퉁퉁 부었지만 병원에 안 가고 다 나았다. 제법 큰 부상이었는데 건강 관리를 잘해온 덕분에 후유증 없이 잘 아물었다. 이 또한 감사하다. 그렇더라도 자만하지는 않을 것이다. 자전거 탈 때는 조심하고 건강 관리도 꾸준히 잘 해나갈 작정이다.
글나라동화교실 해님반에서 종강 이벤트로 양말 토끼 인형 만들기를 했는데 나도 난생 처음으로 인형을 만들었다. 다 만들고 의기양양했는데 다른 사람이 만든 것을 보니 팔을 만들지 않았다. 아차, 이런 실수를!
==> 요렇게 잘 만들어야 하는데....ㅎㅎ
바늘로 기워서 팔을 몸통과 구분해야 하는데 미처 안 한 것이다. 어쨌거나 나도 토끼를 만들었다. 어느 회원이 보고‘고요 속에 카리스마가 있는 토끼‘라고 하던데 내가 만든 토끼가 나를 닮았나 보다. (*)
(양말로 토끼 인형 만드는 법) 양말에 따라 느낌이 다르다... 수면 양말도 좋고.. 한 번 만들어 보세요. 만드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최순기씨가 만든 것을 보니 고양이도 있고 응용은 무궁무진합니다.
|
'세상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범초산장 일기 629회) 바람이 차도 할일은 해야 하고... (0) | 2015.03.06 |
---|---|
[스크랩] (범초산장 일기 619회) 약초물과 약초밥 (0) | 2015.01.19 |
[스크랩] (범초 산장일기 614회) 작은 일에 감사하며... (0) | 2014.12.21 |
[스크랩] (범초산장 일기; 613회) 겨울 추위 속에 살아 있는 나물 새싹 (0) | 2014.12.17 |
[스크랩] (범초산장 일기; 612회) 산이 준 눈꽃 선물 (0) | 2014.12.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