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6월 17일, 토요일, 맑음
(범초산장 이야기 788회) 공짜로 먹는 나물
일주일 만에 산장으로 와보니 계곡 물이 바짝 말라 있었다. 아직 완전히 바닥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이 정도까지 물이 마른 적은 없어서 가뭄이 심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계곡물이 줄어들어 물을 뜨기가 힘들었지만 그래도 범초산장 바로 앞에 저수지가 있어서 물을 댈 수가 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고 저수지 물을 수중모터로 뽑아 올렸다. 호스를 연결하는 부품이 없어서 길게는 보내지 못하고 둑에 큰 물통을 놓고 거기에 물을 받아서 물뿌리개로 뿌렸다. 조금 불편하긴 하지만 물이 없어야 문제지 물만 있다면 못할 게 뭔가?
아내라면 어떻게든 호스를 길게 연결하여 물을 뿌렸겠지만 나는 운동도 할겸 물뿌리개로 물을 떠서 뿌려 주었다. 아내는 나보고 편한 길을 두고 멀리 돌아가는 사람이라고 하지만 사람마다 스타일이 다르니 어쩔 수가 없다.
나는 몸을 고생시켜야 마음이 단단해진다고 믿는다. 자꾸 편할 생각만 하면 몸도 마음도 허약해지기 마련이다. 멀리 돌아가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면 전혀 불편하지 않다. 물뿌리개 두 개를 들고 여기 저기 찾아가는 동안에 이 물을 받고 기뻐할 생명들을 생각하면 마냥 기뻤다. 내가 조금 고단해도 상대가 기뻐한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일하다가 지치면 쉬면서 음악 듣고 한영미, 송재찬, 김미희씨가 보내준 새 동화책도 있어서 그것도 읽어야 한다.
범초산장에 오면 시간이 느리게 가지만 일하고 책 읽느라 심심하지는 않았다. 영화를 많이 다운 받아 왔는데 좋아하는 영화 한 편 볼 시간이 없다.
산장에 오면 내가 좋아하는 뽕잎밥을 해 먹는다. 율무를 비롯한 잡곡에 꾸지뽕과 뽕잎을 반씩 섞어서 밥을 했다. 누가 언짢아 하거나 뭐라고 할 사람이 없으니 마음 편하게 해먹는다. 반찬은 소쿠리를 들고 나가 밭에서 딴 고추와 오이에다 내가 좋아하는 명아주 나물을 뜯어서 무쳤다.
명아주는 날씨가 더워지면 밭 주위에 돋아난다. 밭에 농약을 치지 않으니 명아주를 안심하고 뜯어먹는다. 내가 심고 가꾸지 않았으니 명아주는 공짜로 먹는 나물이다. 밭만 있으면 제가 알아서 나오고 저절로 큰다. 공짜라고 맛이 없는 게 아니다. 아주 부드럽고 연하다. 산장에는 이런 공짜 나물이 많다.
토마토가 익어가고 있다. 한 개가 처음으로 익었다. 올해 첫 토마토다. 아흠, 맛있겠다! 먹어보니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다. 밭에서 마트를 거쳐서 사 먹는 게 아니라 원산지에서 바로 딴 토마토라 싱싱하다. 이런 맛에 밭을 가꾼다.
접시꽃이 세 송이 피었다. 이웃집처럼 수십 송이가 핀 것은 아니지만 이거라도 고맙다. 사람은 항상 작은 것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크고 좋은 것만 기뻐하는 사람은 늘 행복할 수 없다. 작은 것에 기뻐하면 무엇이든지 다 기쁘고 행복하다.
황금 달맞이꽃이 피고 물레나물도 피었다. 물레나물은 모종을 사서 여러 포기 심었더니 사상 최대로 많이 필 것 같다. 이제 피기 시작했으니까 계속 피고 질 것이다. 역시 노력한 보람이 있다. 바람개비가 도는 모양인데 물레 같다고 물레나물이란 이름이 붙었다. 간에 좋고 토혈, 지혈, 타박상, 두통에도 효과가 있다.
날이 하도 가물어서 염주가 쑥쑥 크지 않는다. 어떤 것은 말라죽었다. 물뿌리개로 물을 뿌려주지만 일주일에 한 두 번이라 한계가 있다. 어서 비가 와야 할 텐데 비 소식이 없으니 걱정이다.
어리기만 하던 고수가 꽃을 피웠다. 하얗게 무리지어 피니 보기가 좋다. 특이한 향이 좋아서 뜯어먹는 나물인데 남자들 전립선에 좋다.
지난 주에 다 땄는데 이번 주에 오니 또 고추가 열렸다. 하나 둘도 아니고 한 주먹이다. 그리 맵지 않고 부드러워서 지금 먹기에 딱 좋다. 고추를 먹으며 나를 먹여 살리는 밭에 감사했다.
석류꽃이 무더기로 피었다. 수십 개의 해가 초록 숲에서 고개를 빼꼼이 내밀고 있다. 석류는 추위를 싫어해서 봄에 제일 늦게 싹을 내미는 편이지만 이른 봄에는 이렇게 많은 꽃을 피우리라고 누가 생각했겠는가? 조금 늦더라도 제 할일 하는 석류를 보며 사람이든 나무든 재촉하지 말고 느긋하게 기다려주어야 한다는 것을 배운다.
가지와 오이도 몇 개 열렸다. 비가 안 오고 땅이 메마른데도 꾸덕꾸덕 매달았다. 어머니가 나를 위해 내어주시는 선물 같다. 산장에 오면 어머니가 살아계신다. 나 굶지 말라고 무엇이든 다 내어주신다. 아파트에 있을 때는 전혀 생각나지 않는데 범초산장에 오면 어머니가 생각난다.
매실을 땄다. 작년에는 반 소쿠리 밖에 못 땄는데 올해는 작년보다 많다. 우선 한 나무를 땄는데 다 따면 두 소쿠리는 될 것 같다. 과일나무는 해걸이를 한다. 작년에는 얼마 안 되더니 올해는 두배 이상 많다. 그러니 적다고 불평 말고, 많다고 자랑하지 않아야겠다. 그저 그러려니 생각하며 살면 하늘이 알아서 채워준다. 오늘 딴 매실은 설탕에 버무려 매실발효액을 만들었다.
하우스 앞에 놓아둔 화분에 채송화 꽃이 곱게 피었다. 볼 때마다 마음이 밝아진다. 세상의 모든 평화가 이 화분 하나에 다 담겨 있다.
치자 향기가 퍼져 나가고 있다. 열매는 목감기에 차로 끓여 마시는데 향기가 참 좋다. 날씨가 건조한데 어디서 물기를 빨아들여 저렇게 꽃을 피웠는지 신기하다. 밭에만 물을 주었는데 물 한 바가지라도 뿌려주어야겠다. (*) |
'시골집'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범초산장 이야기 790회) 가물어도 꽃은 피어나고... (0) | 2017.06.24 |
---|---|
[스크랩] (범초산장 이야기 789회) 죽을 약 옆에 살 약도 있다 (0) | 2017.06.19 |
[스크랩] (범초산장 이야기 786회) 마르지 않는 계곡물 (0) | 2017.06.05 |
[스크랩] (범초산장 이야기 784회) 방어 파티 (0) | 2017.05.25 |
[스크랩] (범초산장 이야기 782회) 초록숲에서 뽕잎밥과 약초쌈을 먹으며.... (0) | 2017.05.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