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3월 3일, 토요일, 맑음
(범초산장 이야기 843회) 처음 봄을 맞듯이....
처음으로 하늘을 만나는 어린 새처럼 처음으로 땅을 밟고 일어서는 새싹처럼 우리는 하루가 저무는 저녁 무렵에도 아침처럼 새봄처럼 처음처럼 다시 새날을 시작하고 있다.
오늘 부산 낮 기온이 16도까지 올라갔다. 3월에 들어서자 한결 포근해져서 정말 봄이 온 것 같다. 지난 겨울은 몹시 추웠다. 거기다 기침까지 3주 정도 하느라 힘들었다. 봄을 맞지도 못하고 죽는 줄 알았다.
지금이야 언제 그랬냐는 듯이 건강을 회복했지만 그때는 무척 고생했다. 다시 찾아온 봄을 맞고 보니 감회가 새롭다. 내가 몇 번이나 봄을 더 맞을지 알 수 없으니 이번 봄이 정말 소중하게 느껴진다.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에 나오는 여자 주인공도 앓고 있던 병과는 아무 관계없이 어느 날 갑자기 죽었다. 살아서 봄날을 맞는 것이 기적처럼 신기한 일이다. 처음 시작할 때의 마음을 오래 간직하여 끝까지 밀고 나가야 한다. 봄을 맞이하여 겸손한 마음을 갖고 모든 것에 감사해야겠다. 주위 사람들에게도 좋은 모습을 보여주도록 노력해야 할 거고.
<버뮤다>
두구 화훼단지에 들러 봄꽃을 구경했다. 화사한 꽃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오보코니아>
<칼란디바>
<시크라맨>
<이끼용담>
<가랑꼬에>
<무스카리>
<수선화>
아내는 흰색 꽃이 핀 가랑코예 화분을 2200원 주고 샀고, 나는 처음 보는 진달래과 마취목을 12000원 주고 샀다. 사고 나서 검색해 보니 마취목은 5도 이하로 내려가면 죽기 쉽다고 한다. 가을에는 화분에 옮겨 심어 실내에 들여놓아야겠다.
비오는 날 연못에서는 수련들이 잎을 밀어올리고 있다. 산수유도 비를 맞으며 꽃봉오리를 터뜨리고 있다. 볼게 많아서 <봄>이라고 한다는데 사방에서 새눈이 터져 나오고 있다.
지난 수요일에 40밀리미터 정도 비가 온 덕분에 범초산장 계곡에도 물이 많이 고였다. 모터가 겨울에 고장 났는지 물을 뽑아 올리지는 못했지만 언제든지 물을 떠다 쓸 수 있으니 감사한 일이다.
진이는 생후 6개월도 안 되었는데 거의 다 커 버렸다. 짧은 봄날처럼 강아지 시절이 금방 지나갔다. 우리의 인생도 그러할 것이다. 어린 시절이 금방 청소년기가 되고, 젊은 날의 화양연화가 오래 가지 못하고 졸지에 노년기를 맞게 된다. 노인은 처음부터 노인이 아니었고 분명히 어린 시절이 있었다. 몸은 늙었어도 마음속에는 어린 시절이 남아 있다.
삼일절에는 아내와 범초산장에 왔다가 나가면서 두구동에 있는 <어화>라는 식당에서 점심을 사 먹었다. 생선 모듬이 1인당 8천 원인데 음식이 정갈하고 맛이 좋았다. 이 집에 두 번 가보았는데 변함없이 음식을 잘 한다.
윤자명씨가 봄을 맞아 새 동화책을 두 권이나 펴냈다. 봄선물을 받은 것 같아서 기뻤다. 나는 지도하느라 바빠서 동화를 제대로 못 쓰고 있는데 제자들은 저만큼 앞서 가고 있다. 나 대신 제자들이라도 열심히 쓰고 있으니 반갑다.
오늘 범초산장에 와 보니 땅속에서도 따뜻한 봄기운을 느꼈는지 새순이 막 나오고 있었다. 초롱꽃, 머위, 달래, 미나리, 바위취, 사상자, 긴병꽃풀잎....... 와! 내가 좋아하는 봄나물 반찬들이다.
큰개불알풀 꽃이 여기 저기서 피었다. 이 풀은 겨울에도 잘 죽지 않고 생명력이 대단하다. 밭에 한 번 번지면 뿌리를 단단히 박아서 뽑아 내기도 어렵다. 농부에게는 귀찮은 풀이지만 그래도 봄에 제일 먼저 꽃을 피운다. 이 꽃을 보고 벌들이 몰려왔다. 벌 일곱 마리를 잡아 올해 처음으로 벌침을 맞았다. 합곡혈 두 방, 백회혈 두 방, 단전 한 방, 족삼리 두 방이다. 특별히 아픈 데는 없지만 예방 차원에서 맞는다.
봄이 되었으니 농사 준비도 해야 한다. 아내가 앞장 서서 밭을 하나 손보았다. 나보다 일머리가 빨라서 훨씬 잘 한다. 옆에서 어정거리다가 야단맞고 물러났지만 오래 삐지지는 않았다. 아내 혼자만 하게 둘 수는 없어서 다시 옆으로 가서 거들었다.
매화 꽃봉오리가 점점 더 부풀고 있다. 올해는 다른 해보다 늦은 듯 하더니 갑자기 따뜻해지자 더 빨리 터질 듯 하다.
아내가 예식장에 간 뒤에 혼자 반찬을 만들었다. 기린초를 한 소쿠리 뜯어서 된장에 무쳤다. 기린초는 지혈, 염증, 관절, 고혈암, 간질, 이뇨 등... 여러 질환에 좋은 약초다. 맛이 좋아서 자주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 다른 나물이 나오기 전까지는 기린초를 애용하고 있다.
밥을 먹고 나서 마실 물을 만들었다. 그냥 물이 아니라 약초차다. 느릅나무, 구기자, 로즈마리, 감태나무, 녹차 가지를 꺾어 주전자에 물을 붓고 끓였다. 아직 푸른 잎이 나오지 않아서 마른 가지를 재료로 썼다. 그래도 노랗게 잘 우러나왔다. 범초산장에는 약초나무가 많아서 항상 이렇게 마신다. 밥을 할 때도 이 물을 붓는다. 나는 늘 이런 약초나무를 먹기 때문에 보약을 따로 먹지 않는다. 내 몸도 약초나무에 적응이 되었는지 이런 물이 편하다.
실내 기온이 25도까지 올라갔다. 따뜻한 봄기운을 느끼며 느긋하게 약초차를 마시고 있노라니 문득 오래 전 일이 떠올랐다.
내가 아직 결혼하기 전이었는데 공덕초등에 교사로 일하면서 3월 이맘때쯤부터 일요일마다 금정성당에 나갔다. 그 당시 금정성당에는 청년회가 있었는데 안요한씨라는 사람이 총무를 맡고 있었다. 마침 회장을 하던 사람이 이사를 가서 공석이 되자 느닷없이 나에게 부탁을 했다. “미카엘씨가 회장을 맡아주세요!” 청년회에 나간 지 한 달도 안 된 때라 어안이 벙벙했다. “저는 그런 재목이 못 됩니다. 다른 사람을 시키세요.” 그래도 안요한씨는 집요하게 나를 설득했다. “대부분이 여자 회원이라 김 미카엘씨 아니면 할 사람이 없습니다. 제발 맡아주세요!”
나는 그때까지 회장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고 리더쉽이 없어서 난감했다. “화장 시키면 안 나올 겁니다. 도저히 자신이 없어요.” 내가 좀처럼 승낙을 안 하는데도 안요한씨는 포기하지 않았다. 마치 포기라는 말을 모르는 사람 같았다. “걱정할 거 하나도 없습니다. 어려운 일은 내가 다 할 테니 회장 자리에 앉아 있기만 하세요. 하나에서 열까지 내가 전부 도와줄게요.” 그때까지 그처럼 끈질긴 사람을 본 적이 없었고 그 뒤로도 본 기억이 없다. 어찌나 끈덕지게 달라붙는지 마치 찰거머리 같았다. 단, 거머리에서 부정적인 이미지만 빼고. 할 수 없이 승낙을 하고 회장직을 맡았는데 안요한씨는 약속대로 궂은 일을 자기가 다 했다. 공은 나에게 돌리고 힘든 일은 자기가 감당했다. 청년회 사회도 요한씨가 보고 회의 진행도 요한씨가 했다. 나는 이름만 회장이었다. 나는 꼭두각시처럼 요한씨가 시키는 대로만 했다.
지금도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회원 집 방문이었다. 일요일 모임에 결석하는 회원이 있으면 요한씨가 앞장 서서 방문을 했다. 나는 남의 집에 들어가는 것이 쑥스러워서 문앞에서 쭈뼛거렸는데, 요한씨는 자기 집 들어가듯이 쓱 들어갔다. 특히 식사 시간이라도 걸리면 들어가기가 망설여졌다. 요한씨는 거침없이 들어가서 넉살좋게 밥까지 얻어먹었다. 어찌나 비위가 좋은지 얼굴에 철판 몇 장을 깔아 놓은 듯 했다. 그런데도 회원들은 요한씨를 싫어하지 않았다. 나쁜 의도로 그런 일을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모임에서는 아무도 요한씨처럼 총무를 할 사람이 없었고 요한씨가 있었기 때문에 결석자도 잘 나오지 않았다.
나는 일 년 정도 회장을 하다가 시내로 이사를 왔는데 이사를 온 뒤에도 몇 번 요한씨와 연락을 하다가 언젠가부터 연락이 끊어져 버렸다. 지금 요한씨와 연락이 닿는다면 참 반갑게 만나서 그 당시 일을 주고 받을 텐데...... 도무지 연락처를 알 수 없으니 아쉽기만 하다. 지금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좋은 일을 하기 위해서는 요한씨 같은 찰거머리 정신이 필요하다. 성격이 좋다고 행동까지 술에 물 탄 듯 해서는 안 된다. 초심을 살리기 위해서는 블도저 같은 추진력이 필요하다. 해야 할 일을 앞에 두고 내가 미적거리거나 우유부단해질 때는 안요한씨를 생각한다. 그와 오래 사귀지는 못했지만 짧은 기간에도 그가 내게 미친 영향은 엄청 크다. 나는 내 마음 한구석에 찰거머리 정신을 심어 놓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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