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이야기

[스크랩] 왕의 남자, 관객의 남자들인 듯

凡草 2006. 1. 5. 21:29

계백 부인이 전쟁터에 나가기 전에 가족을 죽이려 하는 계백에게 하는 말(속담 뒤집기)와 걸쭉한 전라도 욕(‘씨벌놈아’가 인상적^^;), 그리고 관창 등 화랑의 ‘용맹’ 뒤집어 보기로 <황산벌>은 내게 전율적 감동(?)을 안겨 주었다. 특히 오프닝은 무릎을 ‘탁탁탁’ 치게 만들었다. 당-고구려-백제-신라의 4자 회담.


<왕의 남자>가 이준익 감독의 차기작이라는 말을 듣고 좀체 골방을 벗어나지 않던 습성을 버리고 영화관을 찾았다. ‘전율적 감동’을 선사하는 그만의 풍자와 ‘뒤집어 보기’를 맛보기 위해서 말이다. 쌈짓돈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조조를 보기 위해 새벽(?) 버스를 타고 극장으로 향했다.


눈빛이 인도하는 판타지 속 현실 이야기


그리고 펼쳐진 2시간의 서사는 가슴을 졸이기도 하고 섬뜩해 하기도 하면서 역사에 기댄 판타지의 시공 속으로 나를 이끌어 갔다. 그 길을 인도하는 빛이 있었다. 놀이판의 왕, 장생의 삶에 대한 그리고 광대놀이에 대한 열정이 담긴 눈빛. 역사 속의 왕, 연산의 어미를 잃은 아픔과 왕으로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지 못하는 답답함이 어우러진 광기의 눈빛이 그것이었다.


‘미친’ 왕을 희롱하는 대담함은 ‘해학’으로 귀결된다. 그 해학은 다시 ‘비극’으로 귀결된다. 등장인물 장생, 공길 그리고 연산과 녹수. 그림자와 실체, 다시 실체와 그림자를 이룬다. 광대의 이야기가 영화 속 현실을 담았다가 그 이야기가 현실이 되고, 역사 속의 인물들이 광대의 이야기에 뛰어 들면서 현실이 광대의 이야기가 되면서 말이다.


사극 속에 담긴 부패와 부정의 이야기.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고 무엇인가? 시종 외줄타기 하는 장생의 광대놀음은 다른 모습으로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지속된다.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조선시대의 부조리, 그리고 여전히 우리 시대의 것이기도 한 그 부조리.


비장미를 낳은 캐릭터와 연기자


그냥 살지 않았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 자신의 열정을 불살랐다. 그리고 닥쳐오는 운명의 시간을 당당히 받아들인다. 이것이 비장미를 낳는다. “다시 태어나도 광대로 살리라!”, 장생의 말에 가녀린 목소리로 공길이 화답한다. “나도 다시 광대로 살리라!”


마음에 불길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후회가 담길지라도 그 열정의 꿈을 다시 꾸고 싶은 중독성이 담겨 있다. 그 꿈을 사유하고 싶은 욕망을 품은 관객에게 이 비장미는 카타르시스를 낳기에 충분하다.


이 전율적인 느낌을 스크린에 부활시킨 네 사람의 연기. 이것은 스크린에서 자신의 가슴 속에 감추어진 열정의 꿈틀거림을 관객 스스로 느끼게 만든다. 이것이 감정이입. 감우성과 정진영의 연기의 맛깔은 빛을 발한다. 캐릭터의 영혼이 담겨 있는 듯하다.


관객들, 아마도 그런 연기에 목이 말랐으리라. 너무 연기를 잘하는 연기자의 오버한 감정처리에 식상해 있고, 성공 공식을 따르는 막대기들의 부딪치는 딱딱거림에 역함을 느끼고 너무 익숙한 장르에 질려 있는 사람들에게 청량음료 같은.


오랜만의 갈증 해소였다. 이 영화.


 
출처 : 블로그 > 死神 | 글쓴이 : fataleyes [원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