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집

[스크랩] 129편 나를 세상으로 돌려보내는 산

凡草 2006. 6. 16. 12:56

 2006년  6월 10일 토요일 맑음
내일 비가 온다는 일기 예보가 있어서
오늘 하루 앞당겨 등산을 가기로 했다.
목적지는 표충사 뒤에 있는 재약산 사자봉.
그전에는 일본 사람이 이름을 붙여준 '천황산'이라고 불렀지만 요즘에는 
재약산 사자봉이라고 부른다. 그 옆에 있는
지난 주에 오른 산은 재약산 수미봉이고.
우리 집에서 표충사까지는 약 32킬로미터.
아침을 먹고 표충사로 향했다.
금곡 사거리에서 표충사 안까지 11킬로라고
적혀 있는 걸 보니 표충사가 산골짜기로 상당히 깊숙히 들어간다.
표충사 무료 주차장에 차를 대어 놓고 산행을 시작했다.
오늘 코스는 한계암을 거쳐 금강폭포를 지나 사자봉으로 오르는 
코스다.
금강폭포는 생각했던 것보다 규모가 작아서 사진은 안 찍었다.
한계암은 아주 깊은 계곡 속에 자리잡고 있어서 그 안에 살면 
외로울 것 같다. 거기에 비해 노루실 우리 집은 번화가에 있는
셈이다. 이웃에 집도 있고 저수지도 있으니까
10시 반이 넘어 산을 오르기 시작했기 때문에  정상까지 못 가서
점심 때가 되었다.
자리를 펴 놓고 아내와 둘이서 점심을 먹었다. 반찬은 소찬이지만
산에서 먹는 밥은 황제의 만찬이 부럽지 않다.
점심을 먹고 나서 후식으로는 커피를 마시며 오디를 먹었다. 
지금 노루실에는 오디가 흐드러지고 있다.
나는 오디를 손으로 일일이 하나씩 땄는데 아랫집 할머니에게 들으니
돗자리를 펴놓고 대추 따듯이 막대기로 탁탁 두드리면 한꺼번에 딸 
수 있단다.
나는 아랫집 할머니에게 그 집 대문 앞에 있는 큰 뽕나무의 오디를 
따도 되겠느냐고 했더니 할머니는 웃으며
"우리야 그거 다 떨어져도 안 따 먹어요."
하신다.
나는 그 대신 할머니에게 음료수를 갖다 드렸다.
토요일에는 오디를 많이 따서 효소를 담아야겠다.
이번 토요일이 벌써 기다려진다.
<노루실에서 딴 오디를 간식으로>


점심을 먹고 다시 걷기 시작했는데 계속 오르막이 이어진다. 가파른 오르막길이다. 날씨는 덥고 햇살은 강하고. 그래도 정상 부근까지는 숲이 울창하여 그늘이라 다행이다. 아내는 지난 주보다는 몸 상태가 나은 모양이다. 나는 산에만 오면 없던 기운도 펄펄 난다. 아직 10시간 정도는 충분히 걸을 수 있겠다. 이런 체력을 바탕으로 동화를 안 쓰고 무엇을 할까? 나는 산을 오르며 동화사랑하는 마음을 다진다. 땀을 흘려가며 힘들게 올라가는데 너덜강이 앞을 가로막는다. 잠시 쉬며 물통의 물을 마셨다. 집에서 끓여간 금은화와 느릅나무 배합 차이다. 요즘 내가 즐겨 마시는 차다. 며칠 전에 배가 조금 아픈 듯해서 이 차를 계속 마셨더니 배가 다 나아버렸다. 아내는 진하게 끓인 것은 싫어해서 약한 물을 주고 나는 쓴 맛도 좋아해서 진한 차를 갖고 왔다. 이 산에는 유달리 돌이 많다. 우리 삶에도 힘든 고비가 있듯이 험한 너덜강이 강물처럼 펼쳐져 있다. 그래도 그 너덜강 중간에 상수리 나무가 뿌리를 깊이 박고 우뚝 서 있다. 돌이 아무리 막아도 나무의 생명력은 당할 수가 없다. 사람도 인내심과 끈기만 있으면 어떤 방해도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다. 예전에는 지루하게만 느껴졌던 너덜강마저 지금은 새롭고 신기한 풍경으로 받아들인다. 숲만 계속된다면 단조로울 텐데 돌무더기가 있으니 재미있게 느껴진다. 돌 하나 하나를 징검다리처럼 밟아가며 정상으로 올라갔다. < 재약산의 너덜지대 >

< 정상 아래에서 내려다 본 표충사 계곡 >

가파른 오르막을 끈기있게 오른 끝에 드디어 사자봉 정상이 눈앞에 보인다. 오늘이 토요일이라서 그런지 등산객이 뜸하다. 정상에 서 있는 표지석이 외로워 보인다. 표지석 옆에 있는 돌무더기도 쓸쓸하게 보인다. 여기까지 올라온 수많은 사람들의 손길인듯 돌무덤이 우두커니 서 있다. '나는 왔노라, 보았노라, 사자봉을!' <사자봉 표지석>

<사자봉 정상에 서 있는 돌무덤>

정상에 서니 바람이 한겨울 바람처럼 세차게 분다. 몸이 날려갈 것만 같다. 오래 전에 비바람이 부는 날 여기에 섰을 때는 빗방울이 기관총 쏘듯이 몸을 때려서 아프기까지 했다. 이제는 내려갈 길이다. 어느 길로 갈까? 오른 쪽 수미봉 쪽으로 갈까? 아니면 왼쪽 긴 능선으로 갈까? <정상에서 내려다 본 능선들>

<황소 등처럼 편안해 보이는 길다란 능선>

아내와 의논 끝에 한 번도 안 가본 황소등처럼 긴 능선을 타보기로 했다. 인생은 어차피 모험이고 도전이니까. 많이 가본 길보다는 안 가본 길을 가보는 것이 더 신선할 것이다. 안 가본 길에는 고생도 복병처럼 숨어 있고 간혹 길이 끊어지기도 하지만 고생을 통해 새로운 걸 배우고 익숙한 길에서는 볼 수 없는 새로운 풍경을 보게 된다. 저 긴 능선을 쭉 따라가면 주차장 뒤에 있는 필봉을 거쳐 밑으로 내려갈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안 가본 능선을 탔는데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아서 잡목이 앞을 방해했고 풀이 우거져 으슥했다. 이거 공연히 온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꾹 참고 앞으로 나아갔다. 능선이 생각보다 훨씬 길어서 아무리 걸어도 도무지 끝이 나지 않았다. 도대체 몇 시간을 걸어야 끝이 날 건가? 아내는 내리막길에서 다리가 아프다고 힘들어한다. 쉬어가며 겨우 필봉에 도착하여 아래로 내려오니 무려 7시간이나 걸었다. 나야 멀쩡하지만 아내를 고생시켜서 미안했다. 주차장으로 내려오니 무사히 도착했다는 안도감에 피로가 다 풀렸다. 사람 사는 동네가 지겹고 마음에 안 들 때도 있지만, 오랜 산행 끝에 마을로 내려오면 긴 우주 여행을 한 끝에 지구에 귀환하는 우주비행사처럼 사람 사는 동네가 정겹게 느껴진다. 산은 내게 말한다. 사람들이 때로는 힘들게 하더라도 그 속에서 부대끼며 씩씩하게 살아가라고. 산이 아무리 좋더라도 가끔 찾아와야지 여기 오래 머물면 안 되니 어서 내려가라고. 활시위를 떠난 화살이 다시 활로 돌아가듯 차를 타고 노루실로 돌아왔다. 나를 정답게 맞아주는 진이와 보니. 그래 반갑다. 너희들이 있어서 나 여기로 다시 돌아왔다. (*) ( 범초산장에서 딴 앵두 ) ==내 동화 '개똥나무'에 나온 앵두 관리를 안 해 크기가 콩알만 하다!

출처 : 글나라
글쓴이 : 凡 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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