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집

[스크랩] 비 맞으며 일한 날 [ 251회]

凡草 2009. 5. 17. 21:55

 

 

  비 맞으며 일한 날

 


< 2009년 5월 16일, 토요일, 하루 종일 비 >

 

 눈을 떠봐야 그렇고 그런 풍경.
 어제와 다를 것 없는 일상.
 텔레비전을 켜면 쏟아져 나오는 사건 사고들.
 -부산 아파트에서.

 

 눈을 뜨면 새로운 풍경
 오늘 하루가 어제와는 전혀 다른 세상.
 텔레비전보다는 어서 밖으로 나오라고 불러내는
 나무와 꽃들.
 -노루실 범초산장에서.

 

 

 

 

 

 

 

 

 어제 오전에는 금자씨 부부와 부산 용호동에 있는
이기대 공원을 둘러보았다.
 영월에서 모처럼 시간을 내어 온 분들이라
퍽 반가웠다.
 금자씨 부부는 목요일에 열린 구순 윤자명씨
수상 축하 모임에 참석하였고, 어제는 이기대에 있는
야생화를 둘러본 뒤에 울산을 거쳐 영월로 돌아갔다.
 소박하고 꾸밈없는 분들이라 오래 알고 지낸 이웃처럼
정답게 느껴졌다.

 여름에 다시 시간을 내어 월악산을 거쳐 영월에 가볼
생각이다.
 시간만 넉넉하면 노루실도 보여줄 텐데 이번에는 바빠서
못 보고 그냥 갔다.

 

 금요일 저녁에 기차를 타고 노루실로 들어왔다.
 아내가 여행중이라 혼자 차를 몰고 오려다 그냥 기차를
타고 들어왔다.
 때로는 불편한 것을 일부러 당해보는 것도 괜찮다.

집으로 갈 때는 큰길까지 2킬로미터를 걸어 나가야 하지만
시골길을 걷는 것은 흔히 할 수 없는 체험이다.
 기차에서 내려 밀양역에서 택시를 탔다.
 요금이 13800원이었는데 빈 택시로 돌아가는 게 미안해서
15000원을 주었다.
 내 차가 없어도 노루실로 들어올 수 있으니 그렇게 오지는
아닌 셈이다.

 곧 휴대폰 중계탑이 세워져서 휴대폰도 터진다니

더 편해질 것 같다.

 

 어제 저녁부터 비가 뿌리더니 아침에 일어나 보니 비가
계속 내리고 있었다.
 아침은 언제나처럼 뽕잎밥이다.
 반찬은 야생초 쌈이다.

오늘 뜯어 먹은 야생초는,
신선초, 박하, 왕고들빼기, 민들레, 사상자, 페파민트,
차즈기, 삼백초, 번행초, 상추... 대략 10가지다.
 풍성한 야생초 쌈으로 아침을 맛있게 먹고 밖으로 나갔다.
어제 가져온 새 식구들을  심어야 한다.
 고성 청뫼님 농장에서 얻어온 족두리꽃, 노랑붓꽃, 석창포와
산청 한방축제에서 사온 산마늘을 노루실 여기 저기에 심었다.
 비가 계속 쏟아졌지만 우비를 입고 나가서 비를 맞아가며
심었다. 비올 때 심으면 뿌리를 내리기가 한결 쉬우니까.

 

 뽕잎밥

 

 

 

 왕고들빼기

 

 

 

 점심을 먹고 나서 낫으로 풀을 베었다.
 그 동안에 풀들이 많이 자라서 그대로 두었다간 나무나 약초들이
풀 속에 파묻힐 지경이다.
 풀을 베다가 보니 죽은 줄 알았던 나무들이 살아나서 기뻤다.
지난 가을에 누가 구해준 초피나무가 2주 전까지만 해도 새순이
안 나와서 죽은 줄 알았는데 오늘 보니 파란 싹이 보였다.
 오래 전에 심은 단정화도 5월초까지 싹이 안 나오길래
겨울 추위에 얼어 죽은 줄만 알았다.
 그런데 오늘 보니 새순이 조롱조롱 달리기 시작했다. 

 나무나 사람이나 닮은 점이 참 많다.
 사람 중에도 무엇을 가르쳐주면 얼른 배워서 빨리 깨닫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통 못 알아 듣고 제자리 걸음만 하는 답답한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을 나무라고 야단치면 더욱 주눅이 들어 아무 것도
못하게 되지만, 그러려니 하고 기다려주면 언젠가는 자기 몫을
해낸다.

 

 오늘 밭에서 본 삼백초도 그랬다.
 지난 3월 19일에 삼백초를 3만 원어치나 사서 심었는데도 여지껏
싹이 올라오지 않아서 다 썩어 죽었나 보다고 포기했다.
 그런데 오늘 산마늘을 심느라고 흙을 파헤쳐보니 뜻밖에도 삼백초
뿌리에서 작은 싹이 실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이제야 살아난 것이다.

 흙 속에서 눈을 뜬 어린 싹이 흙 위로 올라오려면 아직
1주일은 더 기다려야 할 판이다.
 하이고, 이놈아 여태 뭐하고 이제 겨우 실낱 같은 싹을 내미냐?
 성질 급한 사람은 속 터져 죽겠대이!
 식물들은 성질이 다 달라서 싹을 내미는 시기도 제각각이다.
어떤 놈은 빨리 나오고 어떤 놈은 느긋하게 잠을 자다가
나오고....
 아직도 무화과 나무는 싹을 내밀지 않았는데 더 기다려봐야겠다.
지금쯤 꿈을 꾸고 있겠지. 꿈을 다 꾸고 나면 눈을 뜰 것이다.

 

 살아난 초피나무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지금 배워서 당장 결과를 내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몇 달 뒤에, 늦게는 몇 년 뒤에야 겨우 결과를 보는 사람도 있다.
 그런 개성을 무시하고 똑같은 잣대로 보면 안 될 것이다.
 가르치는 사람은 묵묵히 참고 기다려야 한다.
 배우는 사람 역시 조급해 하지 말고 뚝심있게 기다려야 한다.
 큰 그릇은 늦게 만들어지고 큰 사람도 단번에 길러지지 않는다.
 지금은 한눈 파는 것 같아도 보고 듣고 체험하는 것들이 모두 좋은
거름이 되어서 언젠가는 꽃을 피울 것이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결과만을 원한다면 큰 결실은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빨리 채근하면 어떻게 큰 결실을 만들 수 있겠는가?
 나는 씨나 어린 나무를 심고 많이 기다려보았기 때문에 어지간히
기다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초피나무와 삼백초가 죽었다고
체념한 걸 보면 아직도 멀었다.
 죽은 줄 알았던 초피나무와 삼백초가 버젓이 살아나 나를 가르치고
있다.
 더 느긋하게 기다리라고.
 당장 조급하게 결과를 바라지 말라고.

 

 예덕나무

 

 

 

  예덕나무도 겨울을 무사히 넘기고 잎을 크게 내밀었다.
 마치 '나 안 죽었소!'라고 말하는 것 같다.
 심은지 오래 되는 만병초도 올해야 처음으로 꽃을 피웠다.
 꽈리도 겨울을 나고 다시 살아났다.
 모람집에서 가져온 톱풀과 꽈리와 수련은 이제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아쉬운 것은 자란이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수련과 연

 

 

 

 꽈리

 

 

 

 만병초 꽃

 

 

  오늘의 장원은 작약이다.
 큰 꽃이 퍽 아름답다.
 작년에는 빈약한 꽃을 보여주더니 올해는 축포를 쏘아올리듯이
거창하다.
 새순이 올라올 때부터 예사롭지 않아서 거름을 듬뿍 주었는데
기대에 어긋나지 않았다.
 일년에 한 번뿐인 꽃잔치지만 기다린 보람이 있다.

 

 작약

 

 

 

 
 비를 맞으며 풀을 베고 화단 정리를 하고 고추 지지대를
만들어주었다.
 환삼덩굴이 벌써 여기 저기서 말썽을 부리고 있다.
보이는 대로 뽑았지만 계속 올라오고 있으니 두렵다.
내 인내심보다 환상덩굴은 한 수 위다.
 내가 아무리 베어내도 어느 순간에는 울타리 꼭대기까지
기어 올라가서 만세를 부른다.
 막아도 막아도 막을 수 없는 환삼덩굴!
 너같은 인내심만 갖는다면 무엇인들 못할까?

 

 시간은 빠르게 흘러서 오후 4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더 머뭇거리면 어두워질 것이다.
 그만 돌아가기로 하고 문을 잠그고 나섰다.
 여전히 쏟아지는 빗줄기.
 환삼덩굴의 인내심을 배우려고 짐을 들고 걸어서 큰길까지
갔다.
 우산에 가방에 야생초 쌈거리까지 들어서 힘에 부쳤지만 참고 걸었다.
환삼덩굴을 욕하면서 그보다 못하면 안 되지.
 환삼덩굴은 아무리 뻗어도 큰길까지는 못 가지만 나는
어떻게든 걸어갔다.

 조금 걷다 쉬고 우산을 이 손 저 손으로 바꿔쥐고.

 아무리 힘들어도 길이 늘어나진 않으니 참고 걸을만 했다.

 

 큰길에서 30여 분을 기다린 끝에 드디어 버스를 탔다.
 버스가 달리는 순간 내 고생도 끝났다.

 환삼덩굴아, 이래도 덤벼볼래?

         (*)

 

 

< 용호동 이기대에서 본 들꽃들>

 

제비쑥

 

 

 

 

청가시덩굴

 

 

 

 

등골나물

 

 

 

 

모래지치

 

 

 

 

창질경이

 

 

 

 

 

 

출처 : 글나라
글쓴이 : 凡 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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