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얼굴의 눈 <2010년 1월 10일 일요일 맑음> 몇 년 전부터 겨울마다 경선아빠 부부와 여행을 갔다. 함께 여행을 가보니 마음도 맞고 허물이 없어서 좋았다. 이번에도 돈을 같이 내어 여행을 가기로 했다. 여태까지 여행 코스는 내가 잡고, 차와 운전은 경선 아빠가 맡았다. 이번에도 내가 코스를 잡았는데 어디로 갈까 하다가 약초 카페에서 알게 된 태자삼님을 찾아가기로 했다. 경선 아빠가 눈이 많은 곳을 가고 싶어 해서 강원도와 전라도를 저울질하다가 강원도는 아무래도 멀고 안 가본 곳을 가보기 위해 전라북도 장수군으로 잡았다.
태자삼님을 찾아가기 전에 카페 쪽지로 몇 차례나 연락이 오간 끝에 드디어 어제 여행을 떠났다. 태자삼님의 조언에 따라 가는 길에 산청에 들러 1월9일부터 며칠간 열리는 산청 시천면 곶감 축제를 보았다. 곶감 경매장에 들어갔더니 마트보다는 확실히 싼 편이었다. 마침 우리 집에서 설 전에 지내는 제사가 하나 있는데 그 때 쓸 곶감과 태자삼님 줄 곶감을 거기서 샀다. 점심은 산청에서 갈비탕을 맛있게 먹었다. 점심을 먹고 장수군 번암면 유정리로 출발했다. 네비게이션이 있어서 모르는 길이라도 헤매지 않고 잘 찾아갔다. 태자삼님을 만나 마을 회관에 짐을 풀었다. 우리가 묵을 곳은 그곳 마을 회관이었는데 거의 펜션 수준이었다. 태자삼님의 주선으로 마을 회관에서 하루 잤는데 심야 보일러가 잘 가동이 되어 아주 쾌적하고 따뜻했다. 첫날은 짐을 회관 안에 넣어두고 뒷산을 올랐다. 거기는 눈이 많이 쌓여 있었다. 하얀 눈을 밟으며 걸었다. 부산에서 볼 수 없는 눈이라 기분 좋게 밟았다. 여태 쌓인 피로가 다 풀리는 기분이었다. 난 시골만 가면 생기가 돌고 마음이 푸근해진다.
태자삼님 집에도 가 보았는데 아직 가족이 안 내려오고 혼자 농사를 짓고 있어서 임시 거처만 만들어 놓았다. 집 모양이 특이해서 뭐냐고 물어보았더니 몽고 사람들이 쓰는 ‘겔’이라고 했다. 겔의 외부에 나무를 덧대어 입혀 놓았다. 내부는 전기 필름을 난방용으로 쓰는데 그리 춥지는 않단다. 강선암도 보고 뒷산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회관은 난방이 잘 되었지만 수도는 물이 얼어서 안 나오는 바람에 태자삼님이 지게로 물을 세 번이나 길어왔다. 우리 때문에 일부러 고생을 해서 미안했다. 아내와 경선 엄마가 밥을 해서 저녁을 먹고 태자삼님과 부산에서 사간 생탁 막걸리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업하던 이야기, 농장을 가꾼 이야기 등... 태자삼님은 이야기를 아주 잘 해서 나는 맞장구만 쳐주며 들었다. 이야기 도중에 들었는데, 상처가 났을 때는 돌나물을 으깨서 바르면 상처가 잘 아문다고 했다. 그리고 위궤양에는 찹쌀을 볶아서 가루로 내어 빈속에 한 두 숟갈씩 먹으며 아주 좋단다. 태자삼님은 농약을 쓰지 않고 지리 바꽃이나 자리공 같은 여러 가지 독초를 이용하고 있는데 직접 실험을 해가며 농사를 짓고 있단다.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듣다 보니 밤이 깊어 잠자리에 들었다. 난방이 얼마나 잘 되는지 더워서 옷을 다 벗어야 할 판이었다.
오늘 아침을 먹고 가까운 곳에 있는 장안산을 찾아 가기로 했다. 그 전에 지리산 흑돼지 고기를 싸게 파는 곳이 운봉에 있다고 해서 운봉으로 먼저 갔다. 길을 잘못 들었는지 꼬불 꼬불한 고갯길이 이어졌다. 나중에는 눈이 많아 도저히 올라갈 수가 없어서 도로 내려오는데 비탈길이었다. 나는 눈길을 몇 번 다녀봐서 눈길이 얼마나 무서운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몇 번이나 주의를 주었더니 경선 아빠가 웃었다. “선생님은 눈길 노이로제에 걸려 있네요. 아무래도 중증 같습니다.” 그랬는데 그 말을 하고 나서 10분도 지나기 전에 고갯길에서 차가 미끄러져 농수로에 한쪽 바퀴가 빠져 버렸다. 그리 심한 고갯길은 아니라서 2단으로 천천히 내려왔으면 될 텐데 D로 내려오다가 브레이크를 밟으니 차가 돌면서 농수로에 처박혔다. 차가 도저히 올라올 수 없어서 보험회사 긴급출동에 전화를 걸었더니 사고가 많아서 당장 올 수가 없단다. 한 시간이나 기다린 끝에 견인차가 와서 차를 올려주었다. 다행히 차는 별 피해가 없었다. 우리는 그만하면 다행이라고 한숨을 내쉬며 차에 올랐다.
그러는 동안에 시간이 많이 지나서 점심때가 되었다. 우리는 장안산 행을 포기하고 좋은 길로 운봉에 갔다.
운봉 읍에 있는 황산 흙돼지 정육점에서 고기를 사고 이번에는 지리산 온천랜드로 방향을 잡았다. 그쪽 지리를 내가 정확히 알 수 없어서 네비게이션을 쳐서 갔다. 그런데 도중에 험한 내리막길이 이어졌다. 이미 들어선 참이라 차를 돌릴 수가 없었다. 옆을 보니 까마득한 낭떠러지였다. 차가 굴러 떨어지면 콩가루가 나버릴 것 같았다. 안 그래도 내가 고소공포증이 있는데다 조금 전에 사고가 난 참이라 간이 콩알 만해졌다. 경선 아빠도 한 번 예방주사를 맞았기에 이번에는 1단으로 천천히 내려갔다. 아무리 천천히 내려가도 미끄러운 눈길이라 언제 어떻게 될지 몰라서 불안했다. 오늘 운이 나빠서 여기서 죽는 것은 아닌가 별 생각이 다 들었다.
폭신 폭신한 눈길은 괜찮지만 미끄러운 얼음길만 나오면 우리는 간이 오그라들다 못해 터져버릴 지경이었다. 차 안에는 네 사람의 숨소리는 들리지 않고 숨 가쁜 차 엔진 소리만 들렸다. 다른 차는 거의 다니지 않고 어쩌다 한 두 대가 지나갈 뿐이었다. 그런 차도 스노우 타이어를 했거나 체인을 끼운 경우가 많았다. 우리가 하도 천천히 가라고 걱정을 하니까 경선 아빠는 자기도 모르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그 순간 차가 쭈르르 미끄러지면서 시멘트벽을 들이받고 멈추었다. 옆은 천길 낭떠러지였다.
이번에도 큰 사고는 아니었다. 차 범퍼가 시멘트에 조금 긁힌 정도였다. 그렇지만 이대로 내려가기엔 아직도 가파른 내리막길이라 불안했다. 할 수 없이 체인을 끼우기로 했다. 오랜만에 체인을 끼우려니 경험 부족으로 애를 먹었다. 한참 용을 쓴 끝에 겨우 체인을 끼우고 살살 내려갔다. 얼마 안 내려가서 마침내 좋은 길이 나왔다. 체인을 끼우고 채 5분도 안 내려갔는데 눈이 하나도 없었다. 사람은 한 치 앞을 모른다는 게 실감났다. 내일 일을 어떻게 알 수 있을 것인가? 이번 경험으로 오늘을 즐기면서 충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내일 일은 내일에 맡겨야 할 것이고. 우리는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기분이었다. 눈길에서는 절대로 브레이크를 밟아서는 안 된다. 밟는 순간 차가 홱 돌아버린다. 최저단으로 천천히 가야 하고 브레이크를 밟지 말고 핸들만으로 조정해야 한다. 평지에서 미리미리 브레이크를 밟아서 차의 속도를 떨어뜨려 놓고 내리막길에서는 브레이크를 밟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체험으로 확인했다.
눈은 평화롭고 보기에 좋다. 그러나 무서운 사고의 함정도 지니고 있다. 눈을 즐기더라도 사고가 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겠다. 아무리 평화로운 눈이라도 방심하면 큰 사고가 날 수 있다. 경선 아빠가 운전을 잘 한 덕분에 무사히 돌아왔다. 운전 하느라 애쓴 경선 아빠에게 감사드린다. 다음 여행 때는 오늘 일을 이야기하며 웃을 수 있을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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