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범초산장 일기; 501회>
무엇을 추구하면서 사는가?
< 2013년 3월 20일, 수요일, 구름 >
얼마 전에 물금에서 기차를 타고 원동 배내골에 있는 향로산을 찾아갔다. 물금에서 원동까지는 가까운 거리지만 기차를 타고 가니 기분이 좋았다. 매주 등산을 하지만 같은 산을 가면 지루하기 때문에 가끔 이 산 저 산 돌아가며 다닌다.
간혹 안 가본 산을 찾아갈 때는 가슴이 설렌다. 사람은 무엇을 이루었느냐 보다도 무엇을 추구하면서 사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한다. 즉 결과보다는 목표에 이르는 과정이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등산도 그렇다. 얼마나 높은 산을 올랐느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고, 몇 시간을 걸었느냐도 중요하지 않다. 얼마나 행복하게 걸었느냐가 중요하다. 초보 시절에는 높은 산을 오른 것이 기뻤고, 얼마나 오래 걸었느냐 하는 것도 내심 자랑거리였다.
하지만 모두 부질없는 일이었다. 걸어가면서 라디오를 듣고, 산새 소리를 듣고, 들꽃을 들여다보고, 산 생김새를 이모저모 살펴보는 것이 더 즐거운 일이다. 힘들면 쉬고, 새 힘이 나면 다시 걷고, 배고프면 먹고 집에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면 내려가면 그만이다.
돈이 많아야 행복하다고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남들이 좋은 차 탈 때 버스 타면 되고, 맛있는 것을 먹을 때 나는 싸고 거친 것을 먹으면 된다. 내가 돈이 없어서 불행하다고 생각해야 슬픈 일이지 내가 불행하지 않다고 생각하면 아무렇지도 않다. 산은 나에게 돈을 받지 않는다. 나 역시 산에게 돈을 줘본 일이 없다. 산과 나는 공짜로 정을 주고 받는 사이다. 나는 산과 범초산장에서 별로 큰 돈 안 들이고 행복을 거저 줍고 있다. 가난해도 자기가 행복하다고 생각하면 행복한 것이다. '나는 오늘도 행복하다!'
산을 내려온 뒤에는 목욕탕에 가서 목욕을 하는 즐거움도 크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를 온전하게 산에다 다 써버리지만 아깝지는 않다. 어쩌면 산에 가기 위해 일주일을 사는 지도 모르겠다. 일주일에 4일을 일하고 3일 쉬는데 하루는 등산하는 날로 정해 놓았다. 오래 등산을 다녔는데도 아직까지는 다리가 아프지 않으니 계속 다니고 있다. 언젠가 다리가 아파서 못 가게 되면 그때는 자전거를 탈 것이다. 요즘에는 아내가 일을 하기 때문에 혼자 산에 다니는데 라디오를 들으면서 걸으니까 심심하지는 않다.
나무가 울창한 숲을 걸어가면 마음이 깨끗해지고 머리가 맑아진다. 나무는 저렇게 많아도 고요하고 싱그러운데 사람은 어째서 많이 모이면 다툼이 늘어나고 시끄러울까? 숲은 내 마음을 씻어주는 세탁소다. 일주일 동안 도시에서 때묻은 마음을 숲에서 불어오는 맑은 바람에 훌훌 털어서 날려 보낸다.
가파른 오르막길이 나오면 줄을 잡고 운동하듯이 올라간다. 아무리 긴 오르막이라도 지루하지는 않다. 반드시 끝이 있는 법이니까. 참고 올라가면 끝이 보인다. 오르막 끝에는 하늘이 다소곳이 기다리고 있다. 한참 올라가다가 머리를 만져보니 허전하다. 땀을 닦느라 잠시 모자를 벗었다가 어디에 흘린 모양이다. 그냥 갈까 하다가 찾으러 밑으로 내려갔다. 한 번 잃어버리고 또 잃어버리고 하다가는 버릇이 될 지도 모른다. 힘이 들더라도 찾아야만 조심하게 된다. 올라갔던 길을 다 까먹고 저 밑에 가서야 겨우 찾았다.
한 번 고생을 해봐야 정신을 차릴 것이다. 내 몸이라도 나를 바르게 가르쳐야 한다.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나가면 자신을 통제할 수 없고 결국에는 무너져 버린다. 술도 그렇다. 아버지한테 유전으로 물려받은 술고래 기질이 있어서 그런지 술을 한 잔 두 잔 자꾸 마시다 보니 가끔 술 생각이 난다. 그런 나를 만족시키기 위해 원하는 대로 마신다면 아마 매일 마셔야 할 것이다. 그러다간 술 중독이 되기 십상이다. 술을 마시고 싶어도 2-3일은 건너뛰어서 마셔야 한다. 나는 스스로를 그렇게 가르친다. 그런 자제력을 잃는다면 술을 마셔서 기분은 좋을지 몰라도 건강을 해치게 될 것이다. 한 가지가 좋으면 다른 한 가지는 나쁘기 마련이다. 다 좋을 수는 없다.
오르막길이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산길이 순해진다. 높은 곳인데도 평평한 길이다. 정상에 올라가기까지가 힘들지 한 번 올라가기만 하면 그 다음부터는 아주 수월하다. 땀 흘려 고생한 보람이 있다. 경치도 좋고 마음도 뿌듯하다.
여기 저기 둘러보며 가볍게 걷는다. 축지법이 따로 없다. 산마루 금을 밟고 걸어가면 먼 길도 금방 다가온다. 벼랑에 아슬아슬하게 붙어서 사는 소나무가 있다. 작년에 본 나무인데 올해도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소나무야, 잘 있었느냐? 바위가 네 집이로구나!
힘든 자리에서 살아가고 있는 소나무를 보니 세상살이가 힘들어도 별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말없는 소나무가 나를 위로해준다. 산 위에서 내려다보니 깊은 산속에 집이 보인다. 저 집에는 누가 살고 있을까? 외롭지는 않을까? 산이 가까워서 좋겠다. 저 집에 사는 사람은. 나는 산을 좋아하면서도 정작 산 속에서 살고 싶지는 않다. 그냥 저런 집을 바라보는 것이 즐겁다. 내가 저 집에 산다면 무엇을 하면서 살아갈까? 동물을 키울까? 꽃차를 만들까? 약초를 캐러 다닐까? 아니면 책을 읽으면서 지루함을 달랠까?
온 산에 생강나무 꽃이 노랗게 피었다. 산에도 봄이 찾아왔다. 산에서 딴 생강나무 꽃을 집에 가져와서 꽃차로 만들었다. 먼저 물에 씻은 다음에 물을 끓여 뜨거운 김으로 5-10초 정도 쬐었다. 살균도 할겸 너무 강한 향을 살짝 죽이기 위해서다. 그러고 나서 말렸다가 뜨거운 물에 우려내면 생강나무 꽃차가 된다. 한 잔 마셔보니 향이 그윽하다. 깊은 산속에 있는 듯하다. 샛노란 봄 향기가 방안에 고루 퍼진다. 몸도 훈훈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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