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8회>
환상적인 눈길 산행
<2012년 12월 30일, 일요일, 흐린 뒤에 개임>
29일 토요일에는 아내와 해운대로 바람을 쐬러 갔다. 아내가 생일 때는 큰딸 정현이 집에 가고 없기 때문에 생일 선물을 미리 사주려고 백화점에 들렀다. 그 전에 기장 용궁사에 가서 소원을 빌고 한 바퀴 돌았다.
오랜만에 용궁사에 가보니 많이 달라져 있었다. 볼거리도 많고 잘 꾸며 놓아서 어지간한 유며 관광지보다 나았다. 엊그제 텔레비전에도 소개가 되어서 아마 해맞이 때는 전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올 것 같았다. 용궁사를 보고 시랑대 부근에서 번행초 씨앗도 주운 다음에 백화점으로 갔다.
아내 귀걸이를 사주고 나서 찾아간 곳은 신세계백화점 스파랜드. 이 신세계 백화점은 내가 동화를 가르치러 문화센터에 3년 이상 나가고 있지만 스파랜드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모처럼 아내에게 점수도 딸겸 같이 들어갔다. 입장료는 자그마치 1인당 14000원. 뭐가 이렇게 비싼가 하고 놀랐는데 들어가 보고 또 한 번 놀랐다.
단순한 온천 목욕탕이 아니라 찜질방과 다양한 휴양 시설이 있어서 가족끼리 온 사람들도 많았고, 남녀노소가 가득 했다. 한 마디로 별천지였고 품격있는 온천 휴양지였다. 이러니 사람들이 줄을 서서 들어올만 하다.
아내는 몇 번 와 보았는지 여기 저기 안내해 주었다. 나는 촌닭처럼 아내 뒤를 졸졸 따라 다니며 신기한 눈으로 처음 보는 신기한 시설들을 보고 감탄했다. 차를 갖고 멀리 안 가더라도 도시 중심에서 이런 휴양 시설을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으니까 어쩌다 한 번 온다면 그리 비싼 값은 아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에서 동화 글감을 하나 얻었고, 목욕도 잘 한 뒤에 집으로 돌아왔다.
오늘은 아내와 석남사 터널에서 시작하는 능동산 능선을 걷기로 했다. 어젯밤부터 비가 와서 오늘 갈 수 있을까 염려가 되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비는 그쳤지만 하늘이 잔뜩 흐려서 일단 배낭을 싸고 우산을 준비했다. 아침을 먹고 언양 석남재로 달려갔다.
석남사를 지나면서부터 눈과 얼음이 보여서 긴장이 되었다. 석남 터널까지 잘 올라갈 수 있을까? 중간 지점까지 올라가니 도로에도 얼음이 보여서 내가 겁을 집어 먹었더니 아내가 핸들을 넘겨 받아 용감하게 올라갔다. 다른 차들도 통행을 하는데 내가 겁을 먹었다. 석남 터널 앞에 차를 주차해두고 터널 옆으로 올라갔다. 차에서 내려 도로를 걸어 올라갈 때는 찬바람이 세차게 불어서 몹시 추웠다. 이렇게 추운데 오늘 산행을 잘 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는데 산속으로 들어가 보니 그리 춥지 않았다. 능선에서도 가끔 세찬 바람이 불기는 했지만 산행에는 지장이 없었다.
무슨 일이든 처음 시작할 무렵에는 힘이 들고 여러 가지 방해물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 고비를 넘겨야만 잘해낼 수 있다. 오르막길을 올라가니 몸이 더워지면서 추위에 적응이 되었다. 가지산과 능동산 갈림길에서 우리는 왼쪽 능동산 쪽으로 갔다. 능선을 걸어보니 눈이 엄청 많았다. 여긴 태백산이나 한라산이었다. 등산로에도 눈이 15센티미터 이상 쌓여 있었고 어떤 곳에서는 발이 푹푹 빠지기도 했다.
2주 전에 운문령에서 본 눈길보다 훨씬 더 좋았다. 올 겨울 들어 벌써 세 번째 눈길 산행인데 오늘이 제일 좋았다. 오늘 이곳을 찾지 않고 미적거렸다면 텔레비전을 보거나 집안에서 뱅뱅 돌았겠지만 용기를 내어 찾아온 덕분에 환상적인 눈길을 걸을 수 있었다.
흐리던 하늘도 점점 개어서 햇빛이 났다. 눈에 햇빛이 반사되어 하얗게 빛났지만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서 눈부시지는 않았다. 내석 뒷산에 가서 길을 잘 몰라 두 번이나 고생한 적이 있었다. 오늘 찾아간 능동산 능선은 몇 번이나 타본 구간이라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잘 아는 길이나 눈을 밟으며 즐기기만 하면 되었다. 스패치를 찬 덕분에 눈이 신발 안에 들어올 염려도 없어서 눈을 차며 걸었다. 뽀드득뿌드득, 바삭바삭, 사박사박, 자박자박, 퍽퍽팍팍.....
하얀 능선을 걷고 있자니 그 전에 동화지기 회원들과 덕유산을 탄 일이 생각났다. 그때 한정기, 배유안, 황미숙, 허명남, 이영득 등 여러 제자들과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눈길을 걸어갔지. 처음 눈길 산행을 한 회원들이 있어서 제법 힘들어했지만 그래도 무사히 덕유산 정상까지 가서 곤돌라를 타고 내려갔잖아. 추위에 떨다가 배유안씨가 가져온 양주를 한 잔씩 먹고 몸이 훈훈해졌고....... 왜 지금 그때가 생각날까?
사방이 온통 눈밭이라 점심을 어디서 먹어야 할지 몰랐는데 산봉우리를 하나 넘었더니 몇 사람이 옴팍한 양달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 부부도 푹 꺼진 곳으로 내려가서 점심상을 차렸다. 눈속에 자리잡은 곳이었지만 보기와는 달리 해가 따뜻하게 비쳐서 하나도 춥지 않았다. 반찬으로 가져간 참치 찌개와 오리고기, 김, 김치 등으로 점심을 맛있게 먹었다. 눈밭에 자리를 깔고 앉아서 먹는 기분도 최고였다. 이처럼 도전적인 자세로 살아가면 몸은 조금 힘들지 몰라도 마음은 최상의 희열을 맛볼 수 있다.
집에서 먹을 평범한 점심을 오늘은 눈밭으로 옮겨왔기에 최상의 점심이 되었다. 내 주위에 있는 수많은 눈들이 다 나를 축복하기 위해 빛나고 있었다. 오늘은 이 산에 있는 눈들이 다 내것이 되었다. 눈들은 내 눈속으로 들어오고 내 마음속으로 들어오고 몸속으로도 들어왔다. 눈들은 내가 먹는 밥과 반찬에도 들어와 나를 빛나게 했다. 오늘 하루는 내가 빛나는 사람이 되었다. 눈처럼 눈부신 사람. 나는 소심해서 어딜 가나 잘 나서지 않기에 존재감이 없는 사람이지만 오늘 하루만은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아마 도시에 있는 사람들이 내가 점심 먹는 사진을 보면 눈 속에서 떨며 어떻게 먹을까 걱정할지 모르지만 진짜 하나도 춥지 않았다. 빛나는 눈 덕분에 오늘 점심은 빛나는 밥이 되었다.
다시 배낭을 메고 눈길로 나섰다. 이제 밥도 먹었겠다 느긋하게 걸어갔다. 크림같기도 하고 케잌 같기도 한 눈. 아주 부드러워서 핥아 먹으면 맛있을 것 같은 눈. 밟고 지나가기엔 참 아깝다.
나 혼자라면 능동산까지 갔겠지만 아내가 장갑을 한 켤레만 가져왔는지 손이 시리다고 해서 그 정도로 만족하고 돌아섰다. 그쯤 해서 돌아와도 좋았다. 무엇이든 지나치면 안 한 것만 못한 법이다. 분수에 맞게 살아야지.
산행도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된다. 산이 나에게 허락해주는 부분이 있고 허락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 지난주에는 산의 허락을 받지 않고 아무 데나 들어갔다가 된통 고생했다. 내가 산에 대해 잘 안다고 나대서는 안 되겠다. 사람이 겸손해야 마음 고생을 안 하고 살지. 도시에서나 산에서나...
내가 많이 안다고 남을 무시하거나 남의 마음을 내 마음대로 마구 해석하고 내 잣대에 맞추어 선을 그어놓고 살아서는 안 될 것이다. 두 번이나 갔다가 고생한 내석 숨은 계곡 코스는 날이 풀리면 다시 가서 산의 허락을 받을 것이다. 습지까지 갔으니 80%는 알아내었다.
사는 것이 팍팍하거나 마음이 힘들 때 언제나 찾아가서 기댈 수 있는 산이 있어서 정말 좋다. 오늘은 산이 하얀 옷을 입고 나를 맞아주었다. 다음에 또 오겠노라고 친구처럼 정다운 산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내려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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