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스크랩] (범초산장 이야기 921회) 오키나와 여행 뒷이야기와 여행 일지

凡草 2019. 1. 17. 21:28


    2019, 117, 목요일, 맑음

 

   (범초산장 이야기 921) 오키나와 여행 뒷이야기와 여행 일지 



    일본 사람들이 예전에는 예의 바르고 남을 많이 배려했는데,

 요즘에는 젊은이들이 그전 같지 않고 이기적으로 변해가고 있다고.

  그 이유가 20년 이상 불경기가 지속되다 보니 남을 배려할 마음의 여유가

 사라진 것 같다고 이원범 교수는 분석했다.

  곳간에서 인심난다고 호주머니가 넉넉해야 마음도 너그러워지는 모양이다.

 

  태평양 전쟁으로 일본이 패망했지만 강한 정신력을 경제 재건을 위해 쏟아부었는데

그래도 조금씩 나아지니까 희망을 갖고 서로 배려하며 살았다는 것.

  그러나 일본에 경제 불황이 지속되자 잘 살다가 힘들어지자 젊은이들이 참기 힘들어 하며

이기적인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단다.

 


   이건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지금 불경기가 지속되면서 취업 절벽 때문에 절망하는 청년들이

  늘어가고 있기 때문에 일본을 답습하지 않을까 염려된다.

   일본이 우리보다 여러 가지 면에서 앞서 가고 있기 때문에 고령화 사회라든지

  여러 가지 면에서 일본의 그늘진 면을 따라갈까 봐 걱정이다. 



  우리 6명이 묵은 오키나와 팬션에서는 쓰레기를 분리 수거하여 대문 앞에 내놓는데

 그것도 아무 때나 내놓으면 안 되고, 수거하기 1시간 전후에 내놓아야 한다고.

 너무 일찍 내놓아도 남에게 보기 흉하기 때문이란다.

  쓰레기 봉투를 대문 가까운 곳에 안 보이도록 놓아야지 길 옆에 내놓아도 안 된다고.



   이교수가 일본에 살 때 실제로 겪은 일인데, 한 번은 대문 앞에 쓰레기를 분리하지

않은 채 내놓았더니 이웃 사람들이 냄새나는 쓰레기 봉투를 열어서 일일이 뒤진 끝에

영수증과 서류 조각에서 신분을 확인하고 따지러 왔더란다.

 "도대체 대학 교수라는 분이 이렇게 쓰레기를 몰상식하게 버리면 되나요? 

 분리 수거를 해야지, 이러면 됩니까?"

  여러 사람이 분개한 얼굴로 항의하길래 궁색하지만 이런 변명을 했단다.

 "죄송합니다. 우리 집 애가 중학생이라 미처 모르고 그런 모양입니다.

 앞으로 그런 일이 없도록 주의시키겠습니다."

  사실은 아들이 하지 않았지만 간신히 아들 핑계를 대고 위기를 모면했다고.....



  슈리성을 보고 오다가 공사장 앞에 팻말이 있었는데 이교수가 해석해주었다.

  "일본 사람들은 경고하는 팻말을 세울 때도 자극적인 말은 삼가합니다.

  한국 같으면 '진입금지'라고 쓰겠지만, 여기에서는 '진입을 양해해주기 바랍니다'라고

  부드럽게 씁니다."

  나는 그 말에 공감했다. 같은 말이면 다홍치마 라고 남이 들어서 언짢은 말보다는

 부드러운 표현이 훨씬 더 좋을 거다.

 


   슈리성으로 들어가서 자스민 차를 마시면서 우리 일행이 이야기를 나누자

  해설하는 아가씨가 다가와서 조용히 이야기하라고 두 번이나 주의를 주었다.

  대체로 우리 목소리가 큰 모양이다. 남을 배려하지 않고 차 안에서 통화하는 사람들,

  큰 소리로 떠드는 사람들, 이런 모습이 우리들의 일상이다.

   좀더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가져야겠다.



   일본에서는 시내 차량 속도가 40-50킬로미터 정도이고, 고속도로도 80킬로미터 정도로

 저속을 권장한다. 자동차 운전은 남을 배려하면서 천천히 운전하는데 어지간해서는

 경적을 울리지 않는다. 자동차 뒷면에 초보운전자와 노인(실버)운전자를 나타내는 표시를

 달고 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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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경희씨가 어찌나 자세하게 책자를 찾아 분석하고 정리를 잘 했는지

여행 전문 가이드 이상이다. 이 지면을 빌어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오키나와 여행 일지 (남경희 정리)

 

111(금요일)


1. 세나가지마瀬長島

나하공항 근처의 섬 둘레 1,5km의 낭만의 섬이다. 10분 간격으로 머리 위로 이 착륙하는 비행기 모습이 박진감 넘친다. 섬 일주 차로 5.

섬에 있는 세나가섬 우미카지 테라스에서 식사, 차도 즐길 수 있다.

세나가섬 우미카지 테라스

잡화점, 음식점 등 30개 점포.


2. 국제거리

오키나와 나하 시내의 최대 번화가. 호텔, 이온, 돈키호테 등 대형 쇼핑몰, 식당가 등으 로 번화하며 선물 구입하는데 있어 최적지.

* 사카에마치 시장(전통시장) 

 

3. 구 해군사령부(旧 海軍司令部) 방공호

오키나와 전투 당시 일본 해군사령부가 있었던 곳으로, 1945613일 새벽1시경

사령관을 포함한 약 4,000명의 장병 전원이 여기서 자결하였다. 그때의 수류탄 흔적 등이 생생하게 보존되어, 전쟁의 비참함과 평화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사적이다.

 

 

112(토요일)


1. 해중도로(海中道路) 드라이브 

헨자섬/ 미야기섬/ 이케이섬 3개의 섬을 연결하는 해상도로로 바다 위 활주로라 불리운 다. 전체 길이 4,7Km. 특히 이케이 섬의 해안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2. 류큐무라(琉球村)

오키나와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민속촌.

물소를 이용해 사탕수수를 빻아 설탕을 만드는 모습도 볼 수 있음

10, 16시 전통 퍼레이드 미찌 쥬네(행진) 공연 있음.

9, 13시 에이사(북춤) 공연 있음. 17;00입장 마감 <입장료 1,200>

 

3. 챠탄쵸(北谷町)

챠탄쵸는 흔히 아메리칸 빌리지로 불리운다. 1981년 반환된 미군 비행장 부지에 미국 샌 디에이고에 있는 시포트 빌리지를 모델로 만들어진 신도심으로 츠나베, 미야기, 미 하마, 한비 지역으로 나뉜다.

미하마; 아메리칸 빌리지 내에 무료 공용주차장(이온몰 건너편)에 주차 후 관광.

대관람차를 비롯한 대형마트, 레스토랑, 샵이 들어있다.

비치타워오키나와리조트 앞의 인공비치 선셋비치에서 저녁노을 감상할 것.


4. 트랜지트 카페(Transit Cafe)

수준 높은 창작 메뉴가 가득.

카페 바로 앞에 츠나베 해변 방파제는 산책코스로 유명하다.

      

 

113(일요일)


1. 츄라우미 수족관(해양박공원)

해양박공원 내에는 수족관 이외에도 돌고래쇼를 하는 오키짱 극장, 아열대꽃을 감상할 수 있는 열대드림센터, 류큐왕국을 재현한 오키나와 향토촌이 있음.

해양박공원 내 에메랄드 비치(인공비치)도 아름답다.

* 수족관; 4층으로 이루어진 세계 최대 규모 수족관. 기둥 하나 없이 7,500톤 해수의 수압을 견딜 수 있게 제작. 기네스북 등재. 고래상어 유명.

4; 넓은 바다로의 초대

3; 산호초로의 초대

2; 쿠로시오(일본 난류)로의 여행

1; 심해로의 여행

* 오키짱 극장(돌고래쇼); 동계기간 3/하계 5, 공연시간 확인. 15분간.

관람시간 8;30~18;30 <입장료 1,850>

*駅許田ぎょだ휴게소 ; 할인티켓 판매

 

2. 점심식사; 농예찻집 <사계의 채색>

(農藝茶屋 四季彩;노게이차야 시키노 아야)

*휴일; , 화 전화; 0980-47-5882

숲속 농원 테라스에서 오키나와 가정식 요리 런치; 테이블, 의자 모두 주인 작품

 

3. 오오기미마을 ; 세계 최장수 마을 방문

 

 

114(월요일)


1. 만좌모(萬座毛)

만 명이 앉을 수 있는 털(들판)’ 이라는 뜻에서 유래한 코끼리 코 형태의 해안절벽.

일대에 자란 주변식물은 천연기념물.

 

2. 아나 인터컨티넨탈 만자비치 리조트

산호바다로 둘러싸인 경관이 매우 좋은 리조트

뷔페. 1인당 2,4000

 

 

3. 카츠렌 구스쿠(勝連城ぐすく) 성터

15세기 카츠렌성의 성주 아마와리는 해외교역을 통해 세력을 키워 왕권쟁탈의 야망을 가지고

류큐왕조의 슈리성을 공격하나 결국 대패, 멸망하고 말았다.

사방으로 펼쳐지는 아 름다운 전경을 가진 성터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4. 돈키호테 ; 창고형 대형마트

      

 

115(화요일)


1. 슈리성(首里城)

오키나와가 일본에 흡수(1879)되기 이전 옛 류큐왕국(450년간)의 왕조가 살았던 성.

해양왕국 류큐왕조의 장대함을 느낄 수 있다.

* 성내에서 다도 체험

관람시간 8;00~18;30 <입장료 820>


<관람코스>

슈리성 정문 슈레이몽(守禮城류큐는 예의를 중요시하는 나라’)

소노항우타키 석문(園比屋武御嶽 石門)석회암으로 만들어진 석문으로 우타키는 선조신 즉 선조신이 머무는 곳이라는 의미.

1의 성문 칸카이몽(歡會門)에서부터 내부 관광/중국 책봉사를 환영한다는 의미.

15세기말 류큐왕조는 명나라에 진공품을 바치고 중국 황제로부터 왕호를 수여받는 책봉 관계에 있었다.


류우히(龍桶) 류큐 국왕의 음료수로 사용된 샘물

물시계문(漏刻門)

해시계(日影臺)

만국진량의 종; 정전 앞에 걸렸던 종으로 복제품. 진품은 현립박물관에.

조선, 중국, 일본 등 만국의 가교 역할로 무역으로 번성하는 나라라는 뜻

코우후쿠몽(廣福門); 복을 널리 퍼지게 한다는 뜻으로 이 문을 통과하면 정전이 나온다.

정전(正殿); 따로 티켓 구매. 류큐왕국의 최대 목조 건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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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길동과 오키나와 관련설>


 명문가에서 서자로 태어난 홍길동이 신분의 벽 때문에 출세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절망하여

집을 나가 활빈당을 조직하여 기괴막측한 병법과 신비한 도술로 민중을 괴롭히는

악덕관리들과 싸운다.

  그러나 길동의 재주를 영특히 여긴 왕이 길동에게 형조판서의 벼슬을 내리나

길동은 고국을 하직하고 활빈당도들과 함께 배를 타고 율도국이란 곳에 도착하여

그 곳의 왕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된다.

  여기까지가 소설 홍길동전의 내용이며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알고 있는 전부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홍길동을 소설속의 인물로, 율도국도 소설속의 나라로 생각한다.

  그런데, 전라남도  장성군에서는 홍길동을 실제의 인물로, 그가 태어난 곳을

 장성이라고 하여 마스코트로 사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홍길동은 정말로 존재한 것일까?

   역사적 인물 홍길동은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아곡리 아치실에서 태어났다.

  길동은 어릴때부터 총명하고 영특하였으나 서자의 관리등용을 금지하는 경국대전의 반포로

 과거시험을 포기하고 집을 떠난다.

  그 후 경상도 김천 황악산에 들어가 학조대사에게 병법과 무술을 배운 후 뜻이 맞는 자들을

규합하여 활빈당을 조직하고 전라남도 등지에서 백성들을 괴롭히는 양반가에 침입하여

재물을 빼앗아 불쌍한 양민들에게 나눠주는 의적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활빈당은 관군에게 쫓겨 현재의 법성포 근처에서 배를 타고 나주 압해도로

근거지를 옮긴다. 집요한 관군의 토벌작전을 피하기 위해 가짜 홍길동을 내세워

체포당하게 한 후 생업에 종사하며 평화스럽게 살아가나 전라도 도사 한건이 홍길동 집단을

괴롭히자 불과 15년 만에 생업을 뒤로 한 채 다시 투쟁에 들어간다.

  5년 후, 조정은 홍길동을 추포하기 위해 해상 봉쇄작전을 펼쳤으나 홍길동은 상륙작전을

단행하여 빠져나온 후 충청도로 세력을 넓힌다. 길동은 심지어는 공주 무성산에 요새를 쌓아

관군에 대항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결국 홍길동 일당은 체포되는 형식으로 자수하고 충청도에서 서울로 압송되어

 의금부에 갇힌 후, 남해 삼천리로 유배형을 선고받았다. 

  그 뒤에 소설에서는 홍길동이 율도국으로 간 것으로 되어있다.

 오키나와 파조간도의 오야케아카하치(赤蜂)와 그 일당은 후루수토지역의 집단거주지를

조성하고 인근의 지배권을 장악하여 미야코지마(궁고도)의 민중들을 규합하여

추장인 나카소네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였다.

   그 후, 구메지마(久米島)에 상륙하여 추장을 몰아내고 일본, 유구국, 중국을 상대로

 중계무역을 하면서 동중국해의 해상권을 장악하고 섬의 요처에 성(城)을 구축한다.

 

  오야케아카하치 추모비 번역 -

 「오야케아카하치(赤蜂)는 별명을 홍가와라(洪家王) 아카하치라고도 칭하였다.

 그는 군웅할거 시대에 두각을 나타내어 당시 오호하마촌(大兵村)을 근거지로

 집단 생활을 하였으며 민중의 제왕으로 추앙받았다. 

  문명(文明) 18년(서기 1486년) 오키나와 본도 중산왕조의 상진왕은 사신을

야에야마 지역으로 파견하여 이리키야아마리 축제를 음사사교(陰邪邪敎)로 규정하여

금지하였는데 이 신앙 탄압에 대하여 섬주민들은 격분하였다.

  그리하여 오야케아카하치는 선두에 서서 중산정부에 대하여 반기를 들었다. 

 그는 중산에 대한 조공을 3년에 걸쳐 중단하여 중산정부의 반응을 기다렸으나,

상진왕은 대리왕자를 대장으로 삼아 구미도의 신녀인 군남풍과 함께

정예부대 3,000여명과 병선 46척을 보내 반란 진압에 나섰다. 아카하치는 방전분투 하였으나

역부족으로 패하고 저원(低原)에서 종적을 감추었다. 

  명응(明應) 9년(서기 1500년) 지금부터 454년 전의 일이다. 

  아카하치는 봉건제도에 대해 반항하여 자유민권을 주장하고 섬 주민들을 위해

 용감히 싸운 것이다. 싸움에서는 지고 말았으나, 그의 정신과 행동은 길이 후세에

 전해질 것이다. 여기에 비석을 세움으로써 그의 위업을 기리는 바이다.」


  이렇듯 오야케아카하치는 오키나와의 영웅이다. 

  최근 오키나와 구지천성 발굴 과정에서 고려청자와 조선백자,

 그리고 조선의 돌(화강암)로 만든 선박용 닻이 발견되었으며,

  세종 때에 주조한 상평통보와 함께 국적 미상의 용봉통보(龍鳳通寶)가 발견되었다.

  또한 오키나와의 축제인 나하축제의 종목인 줄다리기가 한국의 줄다리기와 흡사하다는

 점과 오야케아카하치가 섬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성(城)의 양식이 얇은 돌을

 기왓장처럼 포개는 오키나와 방식과는 달리 공주시 무성산 정산에 있는 자연석을

 거칠게 다듬어서 쌓은 홍길동 산성과 거의 흡사하다는 점과 오야케아카하치가

 자신의 별명을 홍가왕(홍가와라 : 洪家王)으로 하고 있다는 점,

   이 외에도 조선말인 소굴(sogool)을 수쿠(sooko)라고 부르는 점과

 마실(masil)을 마시쓰(masiss)라고 부르는 점이 오야케 아카하치가 홍길동이 아니냐는

 추측을 낳고 있다.






출처 : 글나라
글쓴이 : 凡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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