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6회>
우산 속에서 먹은 점심
< 2012년 1월 16일, 월요일, 비 >
토요일에 대학 동기들과 창녕 관룡산에 다녀왔지만 그날 3시간 정도만 산행을 해서 오늘 다시 산으로 갔다. 4-5시간은 걸어야 운동을 한 기분이 들기 때문에 부족한 운동을 채울 작정이었다. 집을 막 나서는데 비가 제법 많이 쏟아졌다. 적게 오면 그냥 맞고 갈 생각이었는데 옷을 적실 정도라 다시 집으로 가서 우산을 받고 나섰다.
겨울 가뭄이 꽤 오래 이어진데다 월요일에는 비가 잘 오지 않아서 비를 맞고 등산한 경험이 기억에 가물가물하다.
나는 등산가기로 마음먹은 날에는 아무리 비가 와도 포기하지 않는다. 비를 좋아하기 때문에 우산을 들고 산으로 간다. 태풍이 불거나 비가 100밀리미터 이상 내리지 않는 한 등산하는 데는 별 지장이 없다. 비가 오는 날에는 인적이 뜸하기 때문에 오히려 혼자 호젓하게 등산을 할 수 있어서 좋다. 산 전체가 다 내 차지다. 여러 산봉우리들이 내 전세방이다.
양산 워터파크 부근을 지나면서 보니 오리들이 비를 맞으며 헤엄치고 있다. 그래, 너희들도 나처럼 비를 즐기고 있구나! 맑으면 맑은 대로 비가 오면 오는 대로 즐기면 된다.
우산 지붕 위에 빗방울들이 타닥 탁- 또닥또닥- 투덕투덕- 따라라라- 갖가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꼭 봄비처럼 느껴진다. 아직 분명히 겨울비지만 곧 봄이 올 것을 예고하는 비 같다. 아니 예고가 아니라 예약이 낫겠다. 봄을 예약하는 봄비. 꽃과 향기를 미리 준비해달라고 예약하러 온 겨울비. 나뭇가지마다 예약 도장을 쾅쾅 찍는다. 나무들이 알았다고 고개를 흔들흔들한다. 비를 즐기며 걷다가 즉석에서 동시 한 편을 지었다.
<예약 도장>
우산 지붕 위에 빗방울이 떨어진다 타닥 탁- 또닥또닥- 따라라라-
아직 동장군이 차가운 입술로 휘파람을 불고 있지만
봄을 예약하러 온 겨울비
빗방울은 꽃과 향기를 준비해달라고 나뭇가지마다 예약 도장을 쾅쾅 찍는다. 새싹을 많이 틔워달라고 땅에도 도장을 꾹꾹-
나무들이 알았다고 손을 흔들흔들 땅이 알았다고 입을 벌려 네네네
봄비보다 더 훈훈하게 느껴지는 겨울비
대나무가 많은 춘추원사 입구
꽃을 심은 화분이 즐비하다
지금 내리는 비를 봄비라고 생각하니 금방 봄꽃들이 왁자하게 피어날 것만 같다. 오늘이 1월 16일이니 이제 봄도 한 달만 지나면 느껴질 것이다. 한 손에는 우산을 들고 다른 손에는 라디오를 쥐었다. 라디오에서는 팝송도 흘러나오고 가요도 흘러나온다. 비처럼 부드럽게. 인상적인 인터뷰도 귀에 들어왔다. 『책은 도끼다』를 지은 박웅현씨가 나와서 카피라이터의 세계를 들려주었다. 박웅현씨는〈그녀의 자전거가 내 가슴속으로 들어왔다〉, 〈2등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넥타이와 청바지는 평등하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진심이 짓는다〉,〈잘 자, 내 꿈 꿔!〉 등의 광고를 만들었는데, 아이디어의 원천이 책이었다고 말했다. 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깊이 있게 들여다봄으로써 '보는 눈'을 가지게 되고 사고의 확장을 이룰 수 있었다는 것이다. 박웅현씨는 책을 읽으면서 좋은 문장에 밑줄을 그어둔다고 했는데 나 역시 그렇게 하기 때문에 더욱 공감이 갔다. ‘책은 도끼다’를 한 권 사봐야겠다.
내가 좋아하는 춘추원 오솔길
비는 계속 내리고 나는 계속 걸었다. 비가 내리지만 산길은 안전하다. 낙엽과 소나무 잎이 떨어져 있어서 카페를 밟는 것처럼 부드럽고 편안하다. 길이 미끄럽지도 않다. 산봉우리에는 안개가 자욱하다. 비와 안개를 즐기며 정상에 올랐다. 이제 점심을 먹어야 할 시각이 되었다. 비가 오니 우산을 펴고 나무 밑에 앉았다. 배낭은 비닐 덮개로 덮어서 물에 젖지 않았다. 배낭 안에서 도시락과 반찬을 꺼냈다. 보온 밥통에 든 잡곡밥과, 참치 통조림 하나, 파김치와 김치, 산오자잎 장아찌, 김, 멸치가 전부지만 이만하면 풍성하다. 반 평도 안 되는 우산 아래 점심상이지만 맛있게 먹었다. 내가 담은 엉컹퀴술도 한 잔 하고 커피까지 마셨으니 먹을 건 다 챙겨 먹었다. 비가 온다고 밥 못 먹을 이유가 없다. 조금 찝찝한 건 사실이지만 비를 즐기자면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 점심을 먹으며 대지를 촉촉하게 적셔주는 비를 바라보는 것은 푸짐한 반찬보다 더 낫다.
밥을 먹고 나서 다시 걸었다. 밑으로 내려갔다가 새로운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힘들기는 해도 짜증날 정도는 아니다. 걷는데는 이력이 나서 오르막조차 즐긴다. 내 체력을 돋워주는 오르막이니까. 평지나 내리막길만 있다면 언제 힘을 써볼 것인가? 오르막은 나를 성장시켜주는 디딤돌이다. 오르막을 두 개나 넘고 나니 기다란 내리막길이 이어진다. 즐거운 소풍길이다.
모시풀 군락지를 지나다가 씨앗을 조금 땄다. 산장에 갖고 가서 구석진 곳에 뿌려야겠다.
도덕경에 이런 말이 나온다. 去去去 中知, 行行行 裡覺 (거거거 중지, 행행행리각) ‘가고 가고 가면 가는 도중에 알게 되고, 행하고 행하고 행하면 행하는 도중에 깨닫게 된다.‘ 자꾸 걷다보면 건강도 좋아지고 이것저것 생각도 많이 하게 된다. 앉아서 생각하다가 무엇이 잘 풀리지 않으면 몸을 움직이는 것이 좋다. 계획을 아무리 잘 세워도 실천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자기가 잘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매일 꾸준히 해서 몸에 딱 붙여 놓아야 한다. 무엇을 해도 잘 안 되면 될 때까지 도전해야 한다. 하다 보면 스스로 깨우쳐서 결국 해내게 된다.
어제는 산장에 가서 그릇 받침을 몇 개 만들었다. 동주가 전기톱을 쓰고 있길래 잘라달라고 했더니 선뜻 만들어주었다. 덕분에 이쁜 그릇 받침이 생겼다.
뽕나무 가지 자른 것을 끓여서 뽕나무 차를 마실 때도 나무 받침에 올려놓고 마셨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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