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6회>
비가 온 다음날 가지산에 가면...
<2012년 12월 22일, 토요일, 맑음>
12월 17일에는 석계 한성아파트 앞에서 내려 내석까지 걸어 들어가 뒷삐알산과 체바우골만당을 탔는데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길이라 제법 험한 구간이 많았다.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다가 이마를 다치기도 했고 바위에 무릎을 찧어서 잠시 절룩거리기도 했지만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
원래 목적은 내석에 숨어 있는 계곡들이 많지만 여름에는 원시림처럼 길이 없는 곳이 많아서 잡풀이 없는 겨울에 샅샅이 답사해볼 생각이었는데 엉뚱한 길로 빠지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도 그런 고생을 한 덕분에 반쯤은 알게 되었다. 그날 한 고생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겁을 집어 먹고 안 가면 영원히 포기하는 것이다. 어디서 다쳤는지 알기 때문에 한 번 더 가면 다치지 않고 잘 다닐 수 있다. 다음에 한 번 더 가서 계곡 전체를 알아내어야겠다.
신은 사람에게 완제품을 주지 않고 조립품을 준다는 말이 있다. 무엇을 간절히 바라지만 쉽게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새 차를 사고 싶다, 대학에 합격하고 싶다, 큰돈을 벌고 싶다, 결혼하고 싶다, 공모전에 당선하고 싶다, 승진하고 싶다, 취직하고 싶다... 아무리 기도를 해도 당장 이루어지지 않는다.
신은 약을 올리듯이 소원을 한꺼번에 들어주지 않고 아주 작은 부품을 찔끔찔끔 내려준다. 새 차를 사야 하는데 작은 돈만 들어온다. 멋진 애인이 생겨야 하는데 키가 작고 못 생긴 애인만 얼쩡거린다. 건강한 아이를 바라는데 아픈 아이 때문에 고생한다. 넓은 아파트를 사야 하는데 작은 아파트도 못 사고 빌려서 살고 있다.
작은 부품도 알고 보면 다 필요한 것이다. 작은 부품들을 모아두었다가 조립하면 완제품이 되는 것이다. 부품들을 조립하려면 설계도가 있어야 한다. 부품이 아무리 많아도 설계도가 없으면 조립할 수가 없다.
설계도는 기도와 독서와 명상이다. 겸허하게 기도하지 않고 바라기만 하면 욕심이다. 지혜로운 글을 읽지 않고 스마트폰에만 매달리면 시간만 낭비한다. 명상으로 마음을 정화하지 않으면 정신이 혼란해서 우왕좌왕한다.
오늘은 아내와 언양 운문령으로 갔다. 어제 하루 종일 비가 왔기 때문에 오늘 가지산에 가면 눈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부산과 양산에서는 겨울에 눈을 볼 수 있는 날이 하루나 이틀밖에 안 된다. 그러니 눈을 보려면 비가 온 다음날 가지산으로 가면 된다. 문제는 운문령이 높은 곳에 있어서 눈이나 얼음이 많아서 차가 올라가지 못하면 어떡하지? 하고 걱정했다. 석남사 부근까지 가보니 길은 예상보다 좋았다. 운문령에 눈과 얼음이 쌓여 있긴 했지만 도로 사정은 괜찮았다. 차를 갓길에 대어놓고 가지산으로 올라갔다.
들머리부터 눈이 가득 쌓여 있었다. 오늘 오기를 참 잘 했다. 집에 있었더라면 이렇게 좋은 구경을 못하고 다른 지방을 부러워만 했을 것이다. 눈이 나에게 오지 않으면 내가 찾아가야 한다. 오지 않는 눈을 아무리 기다려본들 올 리가 없다. 내가 몸을 움직여서 눈이 있는 곳을 찾아가면 된다. 가만히 앉아서 소원을 빌지만 말고, 소원을 이루기 위해 진땀을 흘리며 죽을 각오를 해야 한다. 모험하지 않고 편안하게 지내면서 무엇을 이루겠다는 말인가?
크리스마스 트리같은 나무들이 나를 환영한다. “잘 왔다. 애써서 찾아왔으니 좋은 경치를 실컷 구경해라.” 나는 쉴새없이 사진을 찍으면서 감탄한다. 한라산 부럽지 않은 날이다.
남녘은 눈이 귀한 곳이라 많은 사람들이 눈을 구경하러 왔다. 가지산은 1240미터나 되기 때문에 부산 지방에서 겨울에 눈구경을 하려면 여기가 가장 좋다.
신불산은 굽이굽이 도는 길이 많아 눈을 밟는 기분이 별로였는데 운문령에서 쌀바위 구간은 눈길이 길게 펼쳐져 있어서 참 좋았다. 쌀가루 같은 눈을 밟으며 마음 부자가 되었다. 오늘 산에서 나무들과 크리스마스 축제를 한껏 즐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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