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스크랩] 겨울 숲에서 길을 잃고...(487회)

凡草 2012. 12. 25. 22:12

 

<487회>

 

겨울 숲에서 길을 잃고...

 

<2012년 12월 25일, 화요일, 맑음>

 

12월 17일에 내석 뒷삐알산 능선을 타다가 이마와 다리를 다친 적이 있는데

내석 숨은 골짜기를 완전히 탐사하기 위해 12월 24일에 한 번 더 갔다.

양산 지역 아침 최저 기온이 영하 7도까지 내려갔지만 옷을 단단히 입고

집을 나섰다.

이틀 전에 가지산에 갔다 왔지만 그 정도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며칠을 쉬니까 하루 더 등산을 하고 싶었다.

 

 

답사해야 할 능선을 인터넷에서 산행 지도를 검색하여 여러 번 보고 갔다.

산행 들머리가 좌삼리 삼보농장 앞이었는데 방역 때문에 출입을 철저히

통제해서 도저히 접근할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농장 옆 계곡을 타고 산으로 들어갔다. 산길이 안 보여서

그냥 무작정 올라갔다. 크게 위험하지는 않았지만 정식 등산로가 아니어서

제대로 올라가고 있는지 미심쩍었다.

한참이나 올라갔는데도 등산로가 보이지 않았다.

작은 봉우리를 올라서면 또 다른 봉우리가 보이고, 거기를 올라서면 더 높은

봉우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거 낮은 산이라고 우습게 알았다간 큰코 다치겠네!

 

이윽고 정식 등산로를 알리는 리본이 보였다.

그제야 어느 정도 마음이 놓였다.

이제부터는 리본만 따라가면 된다.

하지만 길을 찾았다고 해서 안심할 수는 없었다.

아무리 가도 능걸산 정상이 보이지 않았다.

혹시 지나간 건가?

정상 표지석을 못 보았으니 지나친 것은 아닌 듯 했다.

가도 가도 보이지 않는 산봉우리 꼭대기.

능걸산만 넘으면 바로 계곡으로 내려설 텐데...

 

 

 

 

점심도 못 먹고 걸은 지 2시간 반이나 지났다.

오늘 점심은 추운 날이라 계곡 옆에서 라면을 끓여 밥과 함께 먹으려고

버너와 코펠을 준비해 갔다. 배낭 무게를 줄이려고 물을 준비해 가지

않아서 라면을 끓이려면 계곡으로 내려가야만 했다.

위로 올라갈수록 눈이 점점 많아졌다.

바위가 많은 곳에서는 미끄러워서 엉금엉금 기어야만 했다.

 

 

마침내 능걸산 정상에 도착했다.

이제 한시름 놓았다.

눈길 산행에 대비해서 방수 장갑까지 끼고 갔고 안면보호대와 귀마개까지

끼어서 그리 춥지는 않았다.

오후 1시가 넘었기 때문에 밥을 먹으려면 느긋하게 쉴 여유가 없었다.

 

 

정상을 넘어 계속 걸어갔다.

지도에서 습지 구역을 보았는데 쉽게 나타나지 않았다. 습지 구역까지

가야 계곡 쪽으로 내려갈 수 있었다.

아무리 걸어가도 습지가 보이지 않았다.

얼마를 더 걸어야 하나?

조금씩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드디어 저 앞에 습지구역 안내문이 보였다.

이제 다 왔구나.

하지만 진짜 고생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습지에서 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을 텐데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지도를 정확하게 못 본 탓에 엉뚱한 곳에서 길을 찾았으니

나올 리가 없었다.

배는 고프고 날은 춥고.....

할 수 없이 아무 데로나 내려가기로 했다.

대충 계곡이라고 생각되는 곳으로 방향을 잡고 무턱대고 내려갔다.

 

30분쯤 내려갔을까.

도무지 길이 보이지 않았다. 마치 밀림 속에 들어온 듯 했다.

낮인데도 어두컴컴해서 이러다가 멧돼지라도 만나면 큰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따가운 가시덩굴, 눈으로 덮여 미끄러운 바위, 부러진 나무 줄기, 칡과 다래

덩굴 등이 앞을 가로막아서 한 걸음 한 걸음을 떼어 놓기가 쉽지 않았다.

그리 높지 않은 산인 줄 알고 아이젠은 갖고 오지 않은 참이라 미끄러워도

어쩔 수가 없었다.

 

시계를 보니 벌써 2시가 넘었다.

차라리 온 길로 다시 돌아갔더라면 힘은 들어도 안전하기는 할 텐데...

이미 비탈길을 많이 내려온 터라 그럴 수도 없었다.

‘등산에 자신이 있다고 뽐내더니 오늘 단단히 걸렸구나! 지도를 볼 줄 안다더니

이게 뭐야? 길도 못 찾으면서? 사람이 잘 안 다니는 산은 애당초 피했어야지.’

온갖 후회가 밀려오고 불안감이 가슴을 짓눌렀다.

이러다가 숲속에서 조난을 당하는구나 싶었다.

아직 상류 계곡이라 물이 적은데다가 얼어서 라면을 끓여 먹을 수가 없었다.

조금 더 밑으로 내려가서 물을 구하려고 했는데 지쳐서 일단 밥을 먹고

기운을 내기로 했다.

물은 구할 수 없었지만 눈은 어디에나 쌓여 있었다.

난생 처음으로 눈을 퍼서 라면을 끓였다.

다행히 버너를 가져와서 얼어죽을 염려는 없었다.

 

 

라면과 밥을 먹고 나니 조금 기운이 났다.

아직도 내려가야 할 길은 멀지만 나 자신에게 주문을 걸었다.

‘여태 등산 다닌 경험이 얼마나 많은데 여기서 주저앉을 건가?

잘 될 거야. 이 고비만 지나면 웃을 테니 힘을 내자! 반드시 길을

찾을 수 있다!‘

혹시 발이라도 다치면 걸을 수가 없으니 몸을 최대한으로 낮추어서

엉금엉금 기다시피 했다.

허들 넘듯이 나무 줄기를 타 넘고, 가시덩굴을 만나면 옆으로 돌아가고,

눈이 덮여 있는 바위는 앉아서 미끄럼을 탔다.

내려가는 속도는 더디고 계곡은 한없이 깊었다.

 

해가 점점 지고 있어서 마음이 바빠졌다.

간혹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치솟았지만 휴대폰이 멀쩡하니 긴급한

상황이 되면 연락할 방법은 있었다.

크리스마스 이브라고 여기저기에서 카톡이 날아왔다.

카톡 소리를 들으니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다는 용기를 갖는 것이었다.

계속 길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암시를 하며 밑으로 내려갔다.

 

분명히 물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면 길을 찾을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자꾸만 조급해지는 마음을 침착하게 안정시키는 일이 무엇보다 급했다.

결국 길이 험한 것보다 나를 달래는 문제가 더 중요했다.

서두르다간 다치기 마련이고 자포자기해 버릴 수도 있다.

‘조금씩이라도 내려가고 있잖아. 길이 나올 테니까 겁먹지 마.’

여기서 무사히 살아나간다면 조금은 더 착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람이 죽는다면 돈이 무슨 소용이 있고 재물이나 명예는 어디에 쓸까?

생사의 갈림길에 서고 보니 마음이 담담해지고 한없이 너그러워졌다.

그렇게 2시간 이상을 헤매다가 가까스로 큰 계곡을 발견했다.

 

 

여기는 같은 겨울인데도 물이 철철 흐르고 있었다.

언젠가 여름에 내가 와본 그 계곡이었다.

얼마나 반갑던지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아, 그때 본 계곡은 여전히 맑고 투명하구나!

비로소 살았다는 마음이 들고 긴장이 풀렸다.

아직은 내가 더 할 일이 있나 보구나.

그냥 죽도록 내버려두지는 않네.

 

 

얼어붙은 계곡을 내려오다가 한 번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었지만

다치지는 않았다. 한쪽 발이 물에 빠져 추웠지만 얼지 않게 발을

쾅쾅 구르며 내려왔다. 신발에는 벌써 얼음이 얼기 시작했다.

조금 더 내려가니 사람이 많이 다닌 길이 보였다.

이제는 걱정할 게 없었다.

좀 지치긴 했지만 걷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길을 찾은 뒤에도 계곡은 한없이 길었다. 내려오면서 산봉우리를 보니

여러 개가 겹쳐서 계곡을 꽁꽁 숨겨 놓고 있었다.

지루하도록 내려간 끝에 벧엘병원 출입문에 닿았는데 하필 문을

잠궈 놓았다.

할 수 없이 다시 계곡으로 올라가서 산길을 돌아 큰길까지 내려갔다.

완전히 고난의 연속이었다.

 

 

차가 다니는 길에 내려서자 사람 사는 세상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다시는 길을 모르고 함부로 등산하지는 않겠지만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길을 찾은 자신이 대견스러웠다.

 오전 10시 35분부터 시작해서 오후 5시 10분까지 걸었다.

아무도 안내해주지 않았고, 지도를 잘못 본데다 판단 미숙으로 큰 고생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든 산행을 잘 해냈다.

이런 위험한 산행을 다시는 되풀이하고 싶지 않다.

정말 자만심을 버리고 조심해야겠다.

그렇더라도 이번 산행을 통해 얻은 자신감은 살아가면서 힘든 일을 당할

때마다 나를 지탱해줄 것이다.

버스에 탔더니 크리스마스 캐롤이 울려퍼지고 있었다.

마치 내가 죽었다가 부활한 기분이었다.

다음 산행부터는 안전한 대로만 다녀야지. 이 다짐이 얼마나 오래갈지는

모르지만. ㅎㅎ   (*)

 

* 미련스럽고 바보 같은 산행을 해서 올리지 않으려고 했지만

  사실을 기록하기 위해서 올렸으니 이해하여 주시길...

  결코 자랑이 될 수 없는.

 

 

출처 : 글나라
글쓴이 : 凡 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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